성인[聖人]들과 함께

8월28일 聖 아우구스티노님..등

H-Simon 2010. 8. 27. 17:08

 

 
8월28일(토)
聖 아우구스티노님..등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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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구스티노(8.28)
 
성인명 아우구스티노(Augustine)
축일 8월 2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교회학자, 교부
활동지역 히포(Hippo)
활동연도 354-430년
같은이름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인 로마 관리인 부친 파트리키우스와
그리스도인인 모친 성녀 모니카(8월 27일)의 아들로 354년 11월 13일
아프리카 누미디아 지방의 타가스테 (현 알제리 북쪽)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타가스테와 인근 마다우라에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는데, 370년에는 법률가가 될 꿈을 안고서 수사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카르타고의 대학교에 들어갔다.
이 때 그는 17세였는데, 여기서 한 여인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여
그의 부친이 항상 소중히 여기던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낳았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여러 지방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생활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는 점차적으로 철학에 흥미를 갖다가 존재 문제 특히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373년경 마니교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타가스테와 카르타고 등지에서 10여 년간 교사생활을 한 후
383년에 로마로 가서 수사학교를 세웠으나, 학생들의 태도 때문에 크게
실망하다가 384년 가을부터 밀라노의 수사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신플라톤 철학과 성 암브로시우스(12월 7일) 주교의
설교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암브로시우스의 강의를 통해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은유적 또는 영적으로 해설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한편으로는 명예, 재산, 결혼 등의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려는 소망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정원을 산보하다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하고 반복해서 외치는 신비로운 소리를 듣고
성서를 들어 펼쳐 읽어 본 것이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3장 13절의 말씀이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그래서 그는 386년 8월 교수직을 그만두고 그의 친구 성 알리피우스(8월 15일)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387년 4월 13일 부활성야에 밀라노에서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지도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와 일종의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다가,  391년에 자신의 소망과는 달리 사제로 서품되었고,
5년 후에는 히포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북 아프리카의 교구에서 그리스도교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주교 중의 한 사람으로 거의 35년을 봉사하였다.
그는 사목자의 권위를 행사하되 백성들의 복리와 행복을 위하여
사용하였고, 대성당의 성직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으며,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범사를 행했으며, 
주일과 축일에는 꼭 강론을 하였고, 예비자 교리를 담당하였으며,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의 재정지원을 물색하는 등 사회정의를 위하여
주교직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글을 썼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교구 신자들과
도나투스파 이단자들에게도 반박문을 써 보냈다.
특히 마니교와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박하는 강연회에는
청중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외에도 삼위일체와 은총론에 관해서도 책을 썼는데,
그의 연구 대상은 매우 광범위 하였다.
전해오는 저작으로는 113종의 책과 논문, 200여 통의 편지,
500회의 설교 등이 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는 자신의 개종 과정을 기록한
자서적적 저서인 "고백록"과 호교론적 저서인 "신국론이 있다.
그는 흔히 '은총론의 박사'라고 불린다.
그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교회학자이며 영성가였다.
 
 
그는 서방 그리스도 교회 지성의 모델로서 가톨릭 신앙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는 반달족이 히포를 포위 공격하던 430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에드문도 에로스미스(8.28)
 
성인명 에드문도 에로스미스(Edmund Arrowsmith)
축일 8월 2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영국(UK)
활동연도 1585-1628년
같은이름 에드먼드, 에드몬드, 에드문두스, 에드문드

 


   농부의 아들이었던 성 에드문두스 에로스미스는
잉글랜드 헤이독에서 태어나 브라이언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견진성사 때 받은 에드문두스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집안이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늘 괴로움을 당하게 되자,
1605년 에드문두스는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의 두에로 가서
신학을 공부하여 사제가 되려고 하였다.

   마침내 그는 1612년에 사제로 서품되자,
다음 해에 곧바로 영국 선교 길에 나섰다.
그는 1622년까지 별일 없이 랭커셔의 신자들을 사목하였다.
그러나 곧 그는 체스터의 프로테스탄트 주교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제임스 국왕이 체포된 모든 사제를 풀어주라는명을 내림에 따라 석방되자,
1624년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근친결혼을 주례했다는 한 청년의 밀고 때문에 그는 또다시 1628년에
체포되었고, 가톨릭 사제로서 유죄 판결과 더불어 사형을 선고받고
랭커스터에서 처형당하였다.
그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순교자 40명의 한 사람으로 시성되었다.
 
 
 
 
 
    ▶율리아노(8.28)
 
성인명 율리아노(Julian)
축일 8월 2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군인, 순교자
활동지역 브리우드(Brioude)
활동연도 +3세기경?
같은이름 율리아누스, 줄리안, 줄리언

브리우드의 성 율리아노(Julianus)


   성 율리아누스는 프랑스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순교자이다.
그는 군인이었는데 비엔(Vienne)의 사령관인 크리스피누스가
그리스도교를 반대하자 끝까지 그에게 항거하였다.
 
박해자가 그를 고문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 나쁜 세상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
이제 나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다.”
이 말을 하자마자 형리가 그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후일 교회는 브리우드에 그의 유해를 모셨는데 연일 순례자가 끊이질
않았고 또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지금은 이곳 지명이 생쥐니앙-러-포브르이다.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 데 마스(8.28)
 
성인명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 데 마스(Joaquina de Vedruna de Mas)
축일 8월 28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783-1854년
같은이름 요아뀌마, 요아퀴마, 호아뀌나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는 16세에 변호사인 테오도루스 데 마스와
결혼하였다.
이 결혼은 매우 행복하였고 8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그녀는 33세 때에 과부가 되었다.
 
 
그 후 10여 년 동안 자녀들의 독립을 도와 준 뒤 그녀는
에스파냐의 카탈루냐에 수도 공동체를 세우고 간호와 교육에 헌신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소위 "애덕 카르멜회"이다.
 
 
이 회의 설립을 지원하고 역설한 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클라렛(10월 24일)
끊임없는 지지로 인하여 이 수녀회는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1850년경에 마비 증세가 나타나자,
그녀는 서서히 수녀회의 지도에서 손을 떼었다.
그녀는 70세에 콜레라로 사망하였다.
성녀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는 1940년 복자품에 오른 후 1959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