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8월25일 갈라상스의 聖 요셉, 聖 제네시오님..

H-Simon 2010. 8. 24. 15:22

 

 
8월25일(수)
갈라상스의 聖 요셉, 聖 제네시오님..
 

 

  

갈라상스의 성 요셉(Joseph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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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8.25)
 
 
성인명 요셉(Joseph)
축일 8월 2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교육자
활동지역 갈라상스(Calasanz)
활동연도 1556-1648년
같은이름 요세푸스, 요제프, 조셉, 주세페, 쥬세페

   Saint Joseph Calasantius before the Virgin


   아버지 페드로의 막내아들인 성 요셉은
에스파냐 아라곤의 페트랄타 데 라 살 근처의 칼라산사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스타디야에서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하였으며,
레리다 대학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571-1577년).
그리고 발렌시아 대학과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 어머니와 형이 사망하자, 아버지는 요셉이 돌아와
결혼하여 가문을 이어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요셉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물리치고 1583년 12월 17일
우르겔의 주교인 우고 암브로시우스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성 요셉은 알바라신 교구에서 활동하였다.
교구장 주교는 성 요셉을 자신의 고문 신학자이자 주교대리로 임명하여
피레네 산맥의 외딴 지역들에 대한
성직자들의 개혁과 신앙 재건을 위하여 파견되었다.
요셉은 모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1592년 로마로 가서
콜론나 추기경을 만났는데, 그 추기경 역시 성 요셉을
자신의 고문 신학자 겸 조카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는 로마에서 교육과 자선 활동을 위한 공동체 설립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일반 국민들의 무지와 윤리적 타락,
특히 부모가 죽은 뒤 버림받은 고아들을 보살피고 교육하는 일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티베르 강을 끼고 있는 빈민가에서 
유럽 최초의 무료 공립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는 1597년에 두 사제의 도움으로 이 학교를
연 다음 ‘그리스도교 교리 형제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마침내 1617년 교황 바오로 5세는 성 요셉이 설립한 학교를 공식 수도회로
승인해 주었고, 많은 이들의 지원과 협력으로 이와 유사한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어 학생수가 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1621년 11월 18일에 그의 공동체는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준을 받은
수도회가 되었으며, 성 요셉은 이 수도회의 종신 총장이 되었다.

   초창기의 사제들은 주로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성 요셉은 초급과 중급 학교의 체계화에 기여하였다.
그는 교과과정을 면밀히 구성하였고 어린이들이 선(善)을 사랑하도록
교육 원칙을 세웠다.
“어린이들이 처음부터 신앙과 문학 교육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삶이 행복함을 알게 된다.”고 그는 기록하였다.
이들 학교는 에스파냐, 보헤미아폴란드, 이탈리아 등 수많은 나라에 세워졌다.
 
 
그러나 설립자의 만년은
야심을 가진 후계자들의 심각한 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또 다른 욥처럼 용기를 발휘하였지만 그의 수도회에 대한 신뢰는
그가 죽은 후에야 되살아났다.
그는 로마에서 1648년 8월 25일에 운명하였고,
1748년 8월 7일 시복되었으며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모든 그리스도교 학교의 천상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루도비코(8.25)
 
성인명 루도비코(Louis)
축일 8월 2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 3회원
활동지역 프랑스(France)
활동연도 1214-1270년
같은이름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좌~ 성 루도비코, 성 요셉, 성 프란치스코, 성 아우구스티노


   성 루도비쿠스는 프랑스 왕 루이 8세와 카스티야의 블랑쉬의 아들로
프와시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1226년 그의 부친이 서거했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에 불과 했으므로
어머니가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아들의 왕권을 노리는 샹파뉴의 티보를 비롯하여 야심 많은
귀족들과 대항했고, 어떤 때에는 전쟁도 불사하였다. 
   그는 1234년 5월에 프로방스의 공작 레이먼드의 딸인
마르가리타와 결혼하여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
같은 해에 그는 대권을 물려받고 통치자가 되었고,
모친 블랑쉬는 고문관으로 아들을 도왔다.
그는 1242-1243년의 남 프랑스의 반란을 진압했고,
또 잉글랜드의 헨리 3세를
테임브르그에서 격퇴하였으며,
포와투를 손에 넣는 등 국가의 권력을 점점 확대하였다.
 
 
1248년 그는 십자군을 지휘하여 출정하였으나 1249년에 다미에타에서
포로가 되어 사라센인들의 손에서 곤욕을 치렀다.
그 후 그는 석방되어 성지로 가서 1254년까지 머물다가
모친의 사망 통보를 받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플랑드르와의 평화를 이룩했고 리모주카오르 등 수많은 지역을 평정하였다.

   루도비쿠스는 천성적으로 신심이 깊었고,
또 실제로 이상적인 수도자를 꿈꾸었다.
이 때문에 그는 정의를 펴고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왕으로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권리를 옹호하여 성왕으로 불리었다.
동시에 그는 예리하고 힘찬 군주였으며,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불경한 태도나 말을 한 사실이 없다.
그의 맏아들에게 했던 유언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설명하고
지키도록 부탁할 정도였다.
1270년 그는 재차 십자군을 일으켰다가 8주일 후에 이질에 걸려 운명하였다.

   성인은 한마디로 가장 이상적인 중세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다.
그의 치하에서 프랑스는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
그의 신심은 자신이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됨으로써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작은 형제회 3회의 남자 수호성인이다.
그는 1297년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임종시에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주님, 저는 이제 당신의 집에 들어가렵니다.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하리이다.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나이다.” 그리고 오후 3시경에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생드니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다.
 
 
 
 
 
    ▶제네시오(8.25)
 
성인명 제네시오(Genesius)
축일 8월 2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희극배우,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3세기경
같은이름 게네시오, 게네시우스, 제네시우스

 

성 제네시오(Genesius)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중 무대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사를
풍자한 연극을 공연하였는데,  배우 성 게네시우스(제네시오)
세례를 받으려고 준비하는 예비자로 출연하였다.
이 예식이 공연되던 중에 그는 갑자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겠다는
생각이 불같이 타올라 세례를 받았다.
 
 
그가 이 사실을 황제에게 선언하자
황제는 그를 재판장 플라우티아누스에게 넘겼다.
재판관이 이교신에게 희생 제사를 바치라는 요구를 하자
그는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거절하고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게네시우스는 배우의 수호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