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8월27일 聖女 모니카님..등

H-Simon 2010. 8. 26. 18:53

 

 
8월27일(금)
聖女 모니카님..등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와 성녀 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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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카(8.27)
 
성인명 모니카(Monica)
축일 8월 27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과부, 증거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332-387년
같은이름 모니까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에서 그리스도교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성녀 모니카는 이교도인이던 파트리키우스와 결혼했는데,
남편의 성품은 다소 난폭했고 또 방탕한 기질이 있었다고 한다.
이 부부는 3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 나비지오그리고 페르페투아이다.

   그녀는 끊임없는 기도와 인내로써 370년경에 남편과 시어머니를
개종시킬 수 있었으나 그 다음 해에 과부가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종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당시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에서 공부하던 중에 마니교에
심취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교 철학을 비롯하여 그릇된 길을 걷고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을 따라 로마까지 쫓아갔으며(383년) 또 386년에는
밀라노까지 갔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깊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387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아들인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살다가
이탈리아의 로마 근처 오스티아에서 55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성녀 모니카에 대한 공경은 처음에는 없었으나,
1162년 성녀의 유해가 프랑스의 아라스 근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으로
옮겨지면서 전 교회에 확산되었고, 다른 유물들은 1430년 오스티아에서
로마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당으로 옮겨졌다.
  
성녀 모니카는 가톨릭 여성 단체의 수호성인이자 그리스도교 어머니상의
모범으로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다윗 루이스(8.27)
 
성인명 다윗 루이스(David Lewis)
축일 8월 2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영국(UK)
활동연도 1616-1679년
같은이름 다비드, 데이비드, 레위스

 

   성 다윗은 완강한 프로테스탄트이던 모간 루이스와
가톨릭 신자인 마가렛 프리차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윗 레위스는 아베가브니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교육받았고,
16세 때에 미들 템플에 들어갔고,
그 3년 후에 사베지 백작의 문하생으로 런던으로 갔다.
 
 
그 후 다시 로마로 갔다가 1642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또 2년 후에는 예수회에 입회하여 수련을 마치고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웨일스 지방에서 거의 31년 동안이나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 지방에는 가톨릭을 반대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그는 몸을 피신해야만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다고 한다.

   “나는 양심과 신앙을 위하여 죽는다.
인간의 나약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외면은 죽일 수 있으나
내면은 결코 죽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몸과 피가 화형에 당할 준비를 마쳤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피에는 피, 목숨에는 목숨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안 된다.
오로지 거룩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그대들을 용서한다.
나는 내가 복음의 아들임을 고백하며, 내가 순종하는 것은 복음이다.
… 친구들이여,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그대들의 왕에게 영광을 드려라.
… 나는 끝까지 여러분의 믿음이 올바르게 되도록 기도하겠다.”

   군중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다.
다윗의 유해는 가까운 교회 마당에서 불태워졌다.
프로테스탄트에 의하여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는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체사리오(8.27)
 
성인명 체사리오(Caesarius)
축일 8월 2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대주교, 교부
활동지역 아를(Arles)
활동연도 469/470-542년
같은이름

 

   469년 또는 470년 부르군트 왕국에 속한 샬롱쉬르손의 로마 시민이며
독실한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성 카이사리우스는 18세 되던 해에
샬롱의 주교인 실베스테르로부터 삭발례를 받았다.
 
그리고 489년 레렝스섬의 수도원에 입회하였으며,
포도주 창고 관리인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너무나 엄격한 단식 생활 탓에 건강이 약해지자, 아를로 가서
문법학자이자 수사학자인 포메리우스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그곳의 주교인 에오니우스로부터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았고,
시외에 있는 한 수도원의 지도를 부탁받아 498년 또는 499년에
수도원장이 된 후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서를 썼다.

   수도원에서 3년 정도 생활하던 그는 에오니우스 주교가 사망한 지 몇 달 뒤인 502년 12월에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주교로 선출되어 542년까지 아를의 대주교로 갈리아 남부 지역의 교회 운영을 위한 중책을 맡았다.
이때부터 성 카이사리우스는 수많은 개혁운동을 전개하여 실효를 거두었고, 아리우스 이단과 싸웠으며, 아를의 성당에서는 매일 성무일도를 노래로
기도할 것을 명하였다.
그는 자신의 동생인 성녀 카이사리아(1월 12일)와 함께 수도원을 세우고
수녀들을 위한 규칙을 썼으며, 국제적인 몇 차례의 교회 회의를 주재하였다.
 
 
그는 507년까지는 서고트족의 영향 아래, 508-537년까지는
동고트족의 통치 아래, 그리고 이후에는 프랑크족의 통치 아래에서
정치적, 종교적으로 아를의 주교좌에 도전을 받았으나 이를 확고히 지켜냈다.
그는 부르고뉴 왕에 의하여 아를이 공격을 당했을 때 수많은 희생자들을
돌보았으나, 테오도리쿠스와 동고트족이 아를을 점령했을 때에는
재차 체포되어 모든 직책에서 면직되었다.

   그 후 성 카이사리우스는 로마로 갔고, 그곳에서 프랑스 지방의 교황사절로
임명되어 교황 성 심마쿠스(7월 19일)로부터 팔리움을 받았다.
이 팔리움은 서방 유럽 주교에게 허용된 첫 번째 경우이다.
537년 프랑크족들이 아를을 점령한 후에 성 카이사리우스는
성 요한 수도원에서 거의 모든 생활을 하다가 8월 27일에 운명하였다.
그는 운명할 때까지 자신의 교구를 40년간 지도하였고,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주교였으며, 그의 성덕과 사랑 그리고 능력은 당대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는 529년 오랑주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 반펠라기우스설(Semi-elagianism)의 단죄에 앞장섰으며, 로마법을 응용하여 테오도시아누스 법전의 주요 골격이
되는 '브레비아리움 알라리치'(Breviarium Alarici)를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프랑스 시민법이 되었다고 한다.
라틴 교부의 한 명인 그의 다른 저서와 설교집도 여러 권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