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월29일(금) 聖술피치오 세베로님..등

H-Simon 2010. 1. 28. 17:38

 

  * 1월29일(금)  聖술피치오 세베로님..등 *
                    
1월을 위령성월

                          주님, 저희를 성가정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16.jpg
                    
 
 
 
 
   술피치오 세베로(1.29)
 
성인명 술피치오 세베로(Sulpicius Severus)
축일 1월 2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교회사가
활동지역 부르주(Bourges)
활동연도 +420/425년경
같은이름 술피치우스, 술피키오, 술피키우스

 


   갈리아(Gallia) 지방의 교회사가이자 성인전기 작가인 성 술피키우스 세베루스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대부분의 이야기는 겐나디우스(+5세기경)의

“명인록”(De viris illustribus)과 그의 친구였던 놀라의 성 바울리누스

(Paulinus, 6월 22일)의 “서한”을 통해서이다.

그는 360년경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Aquitaine)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보르도에서

고전과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성 바울리누스를 만난 것 같다.

공부를 마친 뒤 변호사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부유한 집정관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였으나 부인이 일찍 사망하자 곧 공직 생활을 청산하고 389년경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394년경에는 모든 재산을 다 청산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요인은 부인이 일찍 사망한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성 술피키우스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의 권고와

성 바울리누스의 모범에 의한 것이었다.

   그 후 성 술피키우스는 엘루소(Eluso)에 머무르다가 자신을 위해 일부 재산을

남겨 두었던 프레물리아쿰이라는 마을에 은둔하며 영성생활과 저술활동에

열중하였다.

이 마을은 툴루즈와 카르카손사이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는 이곳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었다.

또 그는 이 은둔 장소에 성 마르티누스가 세운 수도원과 유사한 공동체를

형성하여,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장모인 바술라(Bassula)와 함께

생활하였다.

바술라는 성 술피키우스에게 물질적인 도움은 물론 영성생활로 나아가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성 술피키우스가 순교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었다.

406년 12월 갈리아 지방이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았을 때 프레물리아쿰도

황폐화되었는데, 성 술피키우스는 이때 무사히 피신하여 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또 420-425년 사이에 프리밀락(Primillac)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겐나디우스는 성 술피키우스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의 오류에

빠져 생애 말기에 보속행위로 죽을 때까지 저술을 중단하고 절대 침묵의 삶을

살았고, 그 당시의 저자들이 성 술피키우스가 평신도라고 전하는 것과는

달리 사제직을 받았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또한 전통적으로 부르주의 주교였다고 전해지나 그 또한 확실하지 않다.

 
 
 
 
 
  ▶질다(1.29)
 
성인명 질다(Gildas)
축일 1월 2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역사가
활동지역 뤼(Rhuys)
활동연도 500?-570년경
같은이름 길다스, 바도니꼬, 바도니꾸스, 바도니코, 바도니쿠스, 질다스

 


   현자로 불리며 8세기 초반부터 성인으로 공경을 받은 성 길다는

“브리튼의 전복과 정복”(De excidio et conquest Brittaniae)이란 저서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구름에 가려져 있다.

그는 500년경 스트래스클라이드(Strathclyde) 왕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성직자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수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성 길다에 관한 여러 전기와 자료를 종합해 보면 그는 스코틀랜드 서부에 있던

덤바턴(Dumbarton)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클라이드(Clyde) 강 연안

지역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일투드(Illtud, 11월 6일) 성인의 지도로 웨일스(Wales)에서 공부하였다.

이때 돌(Dol)의 주교가 된 성 삼손(Samson, 7월 28일)과 레온의 성 베드로(Petrus)와

같이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자로 생활한 후 아일랜드로 건너가서 사제가 될 준비를 하였고,

북아일랜드의 아마(Armagh)에서 잠시 생활하였다. 이때 그는 많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고 수도원과 교회 건립에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로마(Roma)로 성지순례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독한 삶을 위해

브르타뉴(Bretagne) 외곽 지역에 있는 오트(Houat) 섬에서 은수자로 살았다.

그 후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본토의 뤼에 수도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성 길다는 아일랜드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고 있고, 브르타뉴와 그외 여러

지역의 성당과 수도원의 수호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바도니쿠스(Badonicus)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