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월30일(토-복되신 동정 마리아) 聖무치아노, 聖女바틸다님..

H-Simon 2010. 1. 29. 12:04

 

    * 1월30일(토-복되신 동정 마리아) 
              聖무치아노, 聖女바틸다님..등 *
                    
           

 

    성 무치아노 마리아 위오(Mucianus Maria Wia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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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성녀 마르티나 Martina 1월 30일 동정 순교자 로마(Roma) +226년?
2 마티아 Matthias 1월 30일 주교 예루살렘(Jerusalem) +120년
3 무치아노 ** Mucian 1월 30일 수사,교사   1841-1917년
4 바르사 Barses 1월 30일 주교,증거자 에데사(Edessa) +379년
5 바르시메오 Barsimaeus 1월 30일 주교,순교자 에데사(Edessa) +250년경
6 성녀 바틸다 ** Bathildis 1월 30일 왕비   +680년
7 성녀 사비나 Savina 1월 30일 부인 밀라노(Milano) +311년
8 복자

세바스티아노

     발프레 **

Sebastian Valfre 1월 30일 신부 토리노(Torino) 1629-1710년
9 아그리피노 Agrippinus 1월 30일 주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180년
10 아델렐모 Adelelmus 1월 30일 수도원장   +1100년경
11 아르멘타리오 Armentarius 1월 30일 주교 앙티브(Antibes) +450년?
12 아르멘타리오 Armentarius 1월 30일 주교 파비아(Pavia) +711년
13 성녀 알데군다 Aldegundis 1월 30일 동정녀 모뵈주(Maubeuge) 635-684년
14 알렉산데르 Alexander 1월 30일 노인,순교자   +3세기
15 성녀 투디 Tudy 1월 30일 동정녀   +5세기
16 펠리치아노 Felician 1월 30일 순교자 아프리카(Africa) +연대미상
17 필리피아노 Philippian 1월 30일 순교자 아프리카(Africa) +연대미상
18 성녀 하베릴라 Haberilla 1월 30일 동정녀 메르로(Mehrerau) +1100년경
19 성녀

히야친타

 마리스코티 **

Hyacintha Mariscotti 1월 30일 수녀   1585-1640년
20 히폴리토 Hippolytus 1월 30일 신부,순교자 안티오키아(Antiochia) +250년?
총 20 성인

 

 

 

 

 

   ▶무치아노(1.30)
 
성인명 무치아노(Mucian)
축일 1월 3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교사
활동지역  
활동연도 1841-1917년
같은이름 무치아누스, 무키아노, 무키아누스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는

1841년 벨기에의 멜레에서 신심이 매우 깊은 대장장이와 여인숙 주인이었던

신심 깊은 부인의 여섯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15세인 1856년 나무르(Namur)에서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에 입회하여 세례명인

루도비쿠스 대신 로마 순교자인 무키아누스라는 이름을 수도명으로 받았다.

그는 1858년 히메이와 브뤼셀에 잠시 머물다가 말론의 대학으로 부임하여

58년 동안 헌신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삶의 전부를 보냈다.

   그러나 성 무키아누스 수사에게 이 시간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교육 수도회에 몸담고 있었지만 자신은 재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번외 과목을 가르치고 특별한 교수 방법이 필요 없는 일들을

소임으로 맡았다.

비록 그는 책에 쓰인 지식을 전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가장 적은 재능을 그 능력의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은총을 받았다.

각 개인에게 있어 최고의 것을 끌어내는 능력은 성 무키아누스 수사가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였다.

그의 삶에 있어서 온화함과 성스러움은

 “항상 기도하는 수사”로 인정받는 탁월한 모범이었다.

   성 무키아누스의 묘소를 참배하는 관습은 그의 선종 직후부터 생겼다.

벨기에에서 그는 하느님과의 중재자로 알려져 사후 20년도 지나지 않은

1936년부터 시성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1977년 10월 30일 동료 수사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

(Michael Febres Cordero, 2월 9일)와 함께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2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무키아누스의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벨기에의 빛, 그의 수도회의 빛”으로 선포하였다.

벨기에의 주교들은 성 무키아누스에 대해 그가 어떠한 신학적, 영적 명제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이름을 떠올릴만한 무엇도 남기지 않았지만,

일상적인 삶 안에서 그는 늘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학생들 사이에서 사도였으며,

매일의 업무를 성덕으로 이행하여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며

모든 이를 용서했다고 평했다.

 

 

 

 

 

  ▶바틸다(1.30)
 
성인명 바틸다(Bathildis)
축일 1월 3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왕비
활동지역  
활동연도 +680년
같은이름 바띨다, 바틸디스

 


   잉글랜드(England) 태생의 성녀 바틸다는 641년에 해적들에게 끌려가서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 2세의 궁중 시종장의 하녀로 팔려갔다.

몇 년 후 그녀의 미모와 탁월한 능력이 눈에 띄게 되어

왕이 그녀를 아내로 삼게 되었다.

이때가 649년이다. 그녀는 세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은 모두 왕이 되어

클로테르 3세(Clotaire III), 칠데릭 2세(Childeric II) 그리고 티에리 3세(Thierry III)가 되었다.

   655년에 클로비스 왕이 사망하자 그녀는 섭정이 되어 현명하고도 자비롭게

나라를 다스려 칭송을 받았다.

그녀는 수많은 노예를 해방시켰고,

궁성에서 먼 지역 주민들을 따뜻이 보살폈으며,

생드니, 코르비, 셸르 등에 수많은 수도원을 세웠다.

그 후 665년에 그녀는 수도원으로 은퇴하였다.

교황 성 니콜라우스 1세(Nicolaus I, 11월 13일)가 그녀를 시성하였다.

 

 

 

 

 

   ▶세바스티아노 발프레(1.30)
 
성인명 세바스티아노 발프레(Sebastian Valfre)
축일 1월 30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신부
활동지역 토리노(Torino)
활동연도 1629-1710년
같은이름 세바스띠아노, 세바스띠아누스, 세바스찬, 세바스챤, 세바스티아누스, 쎄바스띠아노, 쎄바스띠아누스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베르두노태생인 세바스티아누스 발프레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소년 때에 이미 사제가 될 결심을 했고,

남의 책을 베껴가면서 부모 몰래 공부하였다.

그가 토리노로 공부하러 갈 때 집에서 준 것은 조그마한 마차 1대 분의

포도주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는 1651년에 토리노의 설교자회에 입회하여 사제가 되었는데,

첫미사는 그의 부모를 위로하기 위하여 고향 성당에서 지냈다.

그의 첫 임무는 어느 작은 성당의 책임자로서 신심생활을 지도하는 일이었다.

그 후 그는 수련장으로 임명되었고, 40세 때에는 원장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명성은 영혼의 지도에서 얻어졌다.

대부분의 시간을 고해소에서 지낸 그는 자기 공동체 회원들뿐만 아니라

만인의 고해신부였다.

그는 영적인 직관력이 뛰어났고, 남의 마음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불신앙과 무관심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사르데냐(Sardegna)의 왕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그에 의하여 회개하였다.

한마디로 그의 생애는 진정한 사목자상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예언한 날에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때 그의 나이는 81세였다.

그는 183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히야친타 마리스코티(1.30)
 
성인명 히야친타 마리스코티(Hyacintha Mariscotti)
축일 1월 3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수녀
활동지역  
활동연도 1585-1640년
같은이름 마리스코티, 히야낀따, 히야친따, 히야킨따, 히야킨타

 


   이탈리아 비테르보인근 비냐렐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녀 히야친타 마리스코티는 비테르보의 성 베르나르디누스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자신과 혼담이 오가던 한 후작이 그녀의 여동생과 결혼하게 된

사건으로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성 베르나르디누스 수녀원에 입회한 그녀는

히야친타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는 수도생활 초기 10여 년간 여전히 사치스럽고 개인적 생활로

수녀회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

그러다가 어느 날 중병에 걸려 고해성사를 하면서 과거를 참회하고

진정한 수도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성녀 히야친타의 가장 큰 덕은 애덕으로 수도원이란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위대하였다.

그녀는 병자와 노인,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보였다.

비테르보 지역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그녀는 병자 간호에 헌신하였고

두 개의 자선 단체도 설립하였다.

그러다가 1640년 1월 30일 비테르보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녀 히야친타는 1726년 9월 1일 교황 베네딕투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때 시성 선언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녀의 고행은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의 지속적인 기적임을 보여주었고,

그녀의 사랑의 사도직은 수많은 설교보다도 영혼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데

유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