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26일(화) *
聖 티모테오, 聖 티토 주교님..등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로마의 성녀 바울라(Paula, 좌)와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Julia, 중)과
성 예로니모(Hieronymus, 우) |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귀족 가문이자 그리스도교 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성녀 바울라는 15세 때인 362년 율리아 가문의 이교도 톡소시우스(Toxotius)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은 이상적인 부부로 존경받았는데,
379년에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엄격한 절제생활과 더불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녀는 성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와 안티오키아(Antiochia)의
바울리누스(Paulinus)를 통하여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히에로니무스의 사업에 적극 가담하여 후원하였다.
384년경 그녀의 큰딸인 블레실라의 죽음으로 한때 비통에 잠겼으나,
다음 해에 그녀는 둘째 딸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과 함께
로마를 떠났고, 성 히에로니무스와 더불어 성지를 순례한 뒤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베들레헴에 정착하였다.
성녀 바울라와 에우스토키움은 구호소와 수도원을 세웠는데,
바울라는 수도원을 지도하였다. 그녀는 성 히에로니무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보조자였으며, 성서 사업에 큰 공헌을 하였다.
성녀 바울라는 402년경에 병에 걸려 2년 후인 404년 1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성녀 바울라는 과부들의 수호자이다. |
노르웨이(Norway)의 국왕 잉게(Inge)의 전속 사제였던 성 아이슈타인은 1157년
니다로스(현재의 트론헤임, Trondheim)의 제2대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그 후 로마(Roma)로 순례의 길을 떠나 1161년까지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귀족들의 간섭을 물리치고 자유롭게 노르웨이의 교회를 지도하였고,
그 당시 유럽의 교회관습들을 노르웨이 교회에 적절하게 이식하여
큰 공헌을 쌓았다.
또한 그는 교황 대사로도 활약하면서 성직자들의 공동생활을 유도하고,
또 이에 알맞은 규정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노르웨이 성직자들은
독신제도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 아이슈타인은 자국 내의 정치 문제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그가 국왕 마그누스(Magnus)의 후원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스베레란 사람 때문에 잠시 영국으로 피신하여
성 에드문즈버리수도원에서 지냈는데, 아마도 그는 이곳에서 노르웨의
성왕 올라부스(Olavus, 7월 29일)의 성인전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성인전의 원고는 영국에서 발견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자주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캔터베리의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12월 29일) 성당을 참배했기 때문이다.
그는 1183년에 스베레와 화해한 뒤 고국으로 돌아왔고, 몇 년 뒤에 운명하였다.
그의 유해는 니다로스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1229년부터 성인으로 공경을 받아왔다. |
성 스테파노 하딩(Stephanus Harding, 좌)과
성 로베르토(Robertus, 중)와 성 알베리히(Alberich, 우) |
프랑스 샤티용쉬르센(Chatillon-sur-Seine) 근교의 은수자였던
성 알베리히(Alberich)는 동료 은수자들과 함께 몰렘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장상은 성 로베르투스(Robertus, 4월 29일)였고, 성 알베리히는 원장이었다.
수도원은 성공하였지만 새 수도자들은 엄격한 규율을 이해하지 못하여
로베르투스는 수도원을 떠났고 성 알베리히는 투옥되었다.
그 후 그 역시 떠났다가 되돌아와서 수도원 재건에 힘을 쏟았으나 성공하지
못하다가, 1098년 20명의 수도자가 시토에서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는데
총원장은 성 로베르투스,
원장은 성 알베리히 그리고
성 스테파누스 하딩(Stephanus Harding, 4월 17일)은 장상이었다.
이들이 시토회의 공동 설립자이다.
그 후 성 로베르투스는 즉시 몰렘으로 되돌아갔고, 성 알베리히가 총원장이
되었다. 그는 베네딕토회의 원회칙을 교정하고, 여기에 엄격성을 더 추가하여
시토회의 회칙을 확정지었다.
성 알베리히는 하느님을 섬김에 있어서 극도의 청빈과 심한 노동의 표양을 보였다. 그가 죽을 때 그의 후임자인 성 스테파누스 하딩은 이런 말을 하였다.
“여러분은 공경하올 사부님과 영적 지도자를 잃었지만,
나는 사부님과 영적 지도자뿐만 아니라 친구이자 주님의 동료 군사를 잃었습니다.” 그는 오브리(Aubrey)로도 불린다. |
리카이니아(Lycaenia)의 리스트라(Lystra) 태생인 성 티모테우스는 그리스인
아버지와 유대교에서 개종한 에우니케(Eunice)의 아들이다.
그는 성 바오로(Paulus)가 리스트라에서 설교할 때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후 성 바오로의 친구이자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사도 16,1-4).
그는 혹시 말썽이 날까봐 할례를 받은 후 바오로의 제2차 전교 여행을 수행하였다.
바오로가 유대인의 적개심 때문에 베레아(Berea)를 몰래 빠져나갈 때,
성 티모테우스는 그대로 남아 있다가 테살로니카(Thessalonica)로 파견되어
그곳의 상황을 보고하고, 또 박해 중의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였다.
58년 성 티모테우스와 에라스투스(Erastus)는 마케도니아(Macedonia)로
파견되었으며, 그 후 코린토스(Corinthos)로 가서 바오로의 가르침을 명심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바오로가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투옥되고 또 로마로 이감되었을 때,
성 티모테우스도 같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 후 그는 에페수스로 가서 그곳의 초대주교로 봉직하였다.
그는 디아나(Diana)를 공경하는 카타고리아의 이교 축제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티모테우스에게 보낸 바오로의 두 편지는 65년경에 마케도니아에서 썼을 것이다. |
크레타의 성 티토(Titus) 주교 |
성 티투스(또는 티토, 디도)는 사도 바오로(Paulus)에 의해 개종한 후
그의 비서가 되어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그를 코린토스(Corinthos)로 파견하여 오류를 시정케 하면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한 헌금을 모금하게 하였다.
그 후 그는 사도 바오로에 의하여 크레타(Creta)의 주교로 축성되어
바오로의 사업을 이어나갔다.
그 후 그는 달마티아(Dalmatia)를 방문한 뒤 크레타로 돌아와서 운명한 듯하다.
그는 법률가 제나가 쓴 “티투스행전”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가 성 바오로로부터 받은 편지의 주요 내용은
영적인 권고를 비롯하여 착한 목자가 지녀야할 자질 및 크레타 신자들에게도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는 것 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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