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0월16일 聖女마르가리타 마리아님..등

H-Simon 2010. 10. 15. 16:56

 

 

10월16일(토)

聖女마르가리타 마리아님..등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

16.jpg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0.16)
 
성인명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et Mary Alacoque)
축일 10월 16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수녀, 환시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647-1690년
같은이름 마가렛, 마르가리따, 마르가리타,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알라콕

 


   클로드 알라코크와 필리베르트 라멩의 딸인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
1647년 6월 22일 프랑스 샤롤레 지방 베로브르의 로트쿠르에서
태어났고, 그녀가 8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자
샤롤레의 성녀 클라라(Clara) 수녀회의 기숙학교에 보내졌다.
 
그러나 15세가 될 때까지 5년 동안은 류머티즘 열로 인하여 자리에 누워서
지냈는데, 어릴 때부터 성체께 대한 신심은 남달리 뛰어났다.
그녀는 결혼을 거절하고 1671년 6월 20일 파레이르모니알(Paray-le-Monial)
성모 방문 수녀회에 입회하였고,
그 이듬해 11월 6일 ‘마르가리타 마리아’라는 수도명으로 수도서약을 하였다.
그녀는 모범적인 수녀였으나 유머 없는 수녀로 통했던 것 같다.

   그녀는 1673년부터 1675년 사이에 그리스도의 환시를
4번이나 경험하였다.
 
이러한 환시에서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당신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널리 전하는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알렸고,
특별히 첫 번째 금요일에 영성체할 것과  매주 목요일 밤에 성시간을 갖고 구속사업에 참여하라는 신심을 그녀에게 교육시켰으며, 
예수 성심 축일의 제정을 요구하셨다.
 
그녀는 자신이 환시 중에 받은 교육을 따르려는 노력 중에 장상으로부터
수많은 퇴짜를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온갖 장애를
극복하였으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발현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당신의 수녀회원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당시 수녀원의 고해신부였던
성 클로드 드 라 콜롬비에르 (Claude de la Colombiere, 2월 15일) 신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콜롬비에르 신부는 파레이르모니알의 예수회 원장이었는데,
그는 마르가리타의 환시가 올바르다고 선언하였다.
1684년 멀랭 수녀가 원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수도원 내의 반대도 종식되었으며,
후일 그녀는 수련장이 되었다.
1686년 초에는 수녀원에서 예수 성심 축일을 거행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고,
2년 후에는 예수 성심께 봉헌된 경당이 수녀원 뜰에 세워졌고,
곧이어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는 관습이 전세계의 성모 방문 수녀회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마르가리타 마리아는 1690년 10월 17일 수녀원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1864년 9월 18일에 시복되었으며,
1920년 5월 13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마르가리타와 성 요한 에우데스(Joannes Eudes, 8월 19일) 그리고
성 클로드 드 라 콜롬비에르는 ‘성심의 성인들’로 불린다.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1765년에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선포되었으니,
그녀의 사후 75년 만의 일이었다.

 

 

 

 
    ▶갈로(10.16)
 
 
성인명 갈로(Gall)
축일 10월 1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은수자, 수도원장
활동지역  
활동연도 +635년경
같은이름 갈루스

 

성 콤갈(Comgall)과 성 갈로(Gallus)와 성 콜룸바노(Culumbanus)


   아일랜드 태생인 성 갈루스(갈로, Gallus)는 뱅거에서
성 콤갈(Comgall, 5월 10일)성 콜룸바누스(Columbanus, 11월 23일)
문하생으로 공부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성 콜룸바누스를 수행하여 프랑스 지방 선교에 나섰던
12명 가운데 한 사람이며, 스승과 더불어 안느그레와 뤽세이유에도 갔었다.
그 후 그들은 취리히(Zurich) 지방을 돌며 복음을 선포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스승은 이탈리아로 갔다.
 
이 때 그는 건강이 나빴으므로 수행하지 못하고 슈타이나흐(Steinach) 강변에서
은수자 생활을 하였는데, 많은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성 갈루스(오늘날의 장크트갈렌, Sankt Gallen)의 수도원은 중세까지
문학과 미술 그리고 음악의 중심지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는 스위스 아르본의 사도로 공경을 받고 있다.

 

 

 

  ▶제라르도 마젤라(10.16)
 
성인명 제라르도 마젤라(Gerard Majella)
축일 10월 1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활동지역  
활동연도 1726-1755년
같은이름 게라르도, 게라르두스, 제라드, 제라르두스, 제라르드

  

성 제라르도 마젤라(Gerardus Majella)


   이탈리아 남부의 무로에서 태어난 성 게라르두스 마젤라는
부친이 사망하자 양복공의 도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하느님을 더욱 열심히 섬기려는 열정으로 카푸친회에 입회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거절당한 후, 라체도니아의 주교관에서 일꾼으로 일하였다.
1745년 그곳의 주교가 서거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양복점을 열었다.

   그 후 그는 174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뜻을 이루게 되었는데,
구속주회의 평수사로서 입회를 허가받은 것이었다.
다행히 그는 1752년에 구속주회의 설립자인
성 알폰수스 마리아 데 리구오리(8월 1일)에 의해 수도서원을 발하였다.
수도원에서도 그는 양복 일을 하면서 병자들을 돌보았는데,
특히 몇 가지 초자연적 은혜가 크게 돋보였다.
예를 들면 동시에 두 장소에 나타나는 일,
예언, 탈혼, 환시 그리고 천상적인 지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녀들의 몇몇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로도 활약하였고,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일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의 성덕과 애덕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754년 그는 임신 중인 네리아 카기아노라는 여성으로부터
자신과 불미스런 관계가 있다고 고발되었으나,
한 마디의 변명도 없이 그 모든 굴욕을 달갑게 안내하였다.
후일 그녀는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고백하였다.
 
그 후 성 게라르두스 마젤라는 나폴리로 파견되었으나 그를 만나려는 방문객들이 너무 많이 몰려오자, 몇 달 후 카포셀레로 가서 그곳의 문지기로 봉사하면서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는 1904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아기 출산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헤드비지스(10.16)
 
성인명 헤드비지스(Hedwig)
축일 10월 16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과부, 수녀
활동지역  
활동연도 1174?-1243년
같은이름 야드비가, 헤드비가, 헤드비그, 헤드비제스, 헤드비히, 헤트비히

 

성녀 헤드비지스(Hedwigis)


   성녀 헤드비지스(Hedwigis)는 독일 바이에른의 안데흐스성에서
베르톨트 공작의 여덟 자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그녀는 프랑코니아의 키칭겐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2세 때에 18살의 폴란드 왕자이자 후에 슐레지엔의 공작이 된
하인리히 1세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매우 열심하고 또 용기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아내의 신앙생활과
자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는 아내의 요청에 따라 폴란드 브로추아프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참사 수도회의 설립을 후원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수도회에 아낌없는 후원을 보냈다.
또한 1202년 노이마르트의 병원에서 나환자 여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아내의 활동에 감동을 받아 트레브니츠에 있는 자신의 땅에
시토회 수녀원을 지어 기부하였다.
이 수녀원은 슐레지엔 지방에 세워진 첫 번째 여자 수도원이었다.
 
   성녀 헤드비지스와 하인리히 1세 사이에는 6명의 자녀가 있었다.
1238년에 남편과 사별한 성녀 헤드비지스는 자신이 세운 수녀원에서
수도생활에만 전념하여 큰 덕을 쌓았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물질적, 영성적 이익을 위하여 늘 헌신하였으나,
자기 자신은 극도의 가난 속에서 하느님만을 섬겼다고 한다.
  
헤트비히, 야드비가(Jadwiga) 등으로도 불리는 성녀 헤드비지스는
1243년 10월 15일 트레브니츠의 수녀원에서 세상을 떠나
수녀원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성인으로 불렸던 그녀는 1267년 3월 26일
교황 클레멘스 4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슐레지엔 지방의 수호성녀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