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6월 5일 聖 보니파시오, 聖 페르디난도 님

H-Simon 2010. 6. 4. 19:03

 

6월 5일(토)

聖 보니파시오, 聖 페르디난도 
 

크레디톤의 성 보니파시오(Bonifat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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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6.5)
 
 
성인명 보니파시오(Boniface)
축일 6월 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대주교, 선교사, 순교자
활동지역 크레디톤(Crediton)
활동연도 675?-754년
같은이름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성 보니파티우스(보니파시오)는 675년경 영국 웨식스(Wessex)

크레디톤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주로 수도원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불과 7세 때에 엑서터(Exeter)의 베네딕토 수도원 학교에

들어갔고, 14세 되던 해에는 너슬링(Nursling)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윈버트(Winbert)의 지도하에 공부하였다.

그는 너슬링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30세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어 교수생활과 설교자로서의 생활이

성공하자 프리슬란트(Friesland)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716년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렇게 되자 그는 718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가 계시는

로마로 갔으며, 여기서 교황으로부터 라인 강 동쪽에

사는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라는 명을 받고 길을 떠났다.

이때부터 그는 보니파티우스로 개명하고 3년 동안

성 빌리브로르두스(Willibrordus, 11월 7일)를 도와

프리슬란트에서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그가 722년 가장 이교도적인 헤센(Hessen)으로 가서

아뫼네부르크에 베네딕토회 최초의 수도원을 설립하고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등 선교활동의 대성공을 거두게 되자,

교황은 보니파티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주교로 서품하고

교회 법령집과 독일의 모든 수도자들과 관리들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써주었다.

이 서한은 그의 독일 선교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특히 프랑크 왕국의 재상인 카를마르텔(Karl Martell)의 보호를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니파티우스는 카를마르텔의 보호를 받으며 723년부터

725년까지 제2차 헤센 선교에 나섰는데, 이때 그는

가이스마르(Geismar)에서 이교도들이 신성시하는 떡갈나무를

베어 경당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개종자들이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후 그는 튀링겐(Thuringen)에 가서 오르트루프(Ohrdruf)에 수도원을

세웠고, 영국의 수도자들을 독일의 선교사로 파견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또한 그는 여러 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744년에 그와 성 스투르미우스(Sturmius, 12월 17일)는 풀다(Fulda)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북유럽에서 가장 큰 중심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그는 독일과 프랑크의 교황대사로 임명되었고,

피핀을 프랑크의 유일한 통치자로 세우는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성 보니파티우스는 754년에 마인츠(Mainz)의 대주교직을

사임하고 성 빌리브로르두스의 사후 이방 관습에 다시 떨어진

프리슬란트를 재건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그가 프리슬란트의 도쿰(Dokkum) 근처 보르네 강변에서

개종자들에게 견진성사를 주려고 준비하던 중에 이교도들의

급습을 받아 살해되었다.

 

 '게르만족의 사도' 또는 '독일의 사도'로 불리는 그의 축일은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1874년부터 전 교회에서 기념하고 있다.

 
 
  ▶페르디난도(6.5)
 
 
성인명 페르디난도(Ferdinand)
축일 6월 5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증거자, 왕자
활동지역 포르투갈(Portugal)
활동연도 1402-1443년
같은이름 페르디난두스, 페르디난드
 


   포르투갈의 요한 1세(Joannes I) 국왕과 필리파(Philippa)

아들인 페르디난도는 포르투갈의 산타렘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 당시의 왕자로서 보기 드문 신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부친의 명에 따라 아비스(Aviz) 기사직을 수여받았지만,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가 제의한 추기경직을 사양할 만큼

겸손하고 열심하였다.

   항해사인 동생 엔리케(Henrique)와 함께 페르디난도는 오늘날

아프리카 북서부 끝에 있는 모로코(Morocco)의 항구 도시 탕헤르(Tangier)

주둔해 있던 무어인을 치기 위하여 군대를 인솔하였으나,

그의 동생인 국왕 에드워드가 큰 착오를 일으킴에 따라

포르투갈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엔리케는 겨우 피신하였으나 페르디난도는 체포되어 혹사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왕이 석방금을 보내지 않아 그는 더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그는 6년 동안이나 포로생활을 하다가

페스(Fez) 감옥에서 옥사하였는데, 무어인들은 그의 시신을

감옥 벽에 걸어두는 등 시신에게조차 온갖 모욕을 주었다.

 

그는 흔히 '지조 있는 사람'으로 불리며 포르투갈의 영웅

중에서도 가장 공경을 받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