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5월 30일 聖女 잔 다르크 님..등

H-Simon 2010. 5. 29. 21:53

 

 

 5월 30(일)

聖女 잔 다르크 ..등

  

성녀 잔 다르크(아르크의 성녀 요안나, Joanna Arcensis)

 

16.jpg

                           

 
 
 
 
   ▶잔 다르크(5.30)  
 
 
성인명 잔 다르크(Jeanne d’Arc)
축일 5월 3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아르크(Arc)
활동연도 1412-1431년
같은이름 요안나, 요한나, 잔, 잔느, 잔다르크, 잔다크, 쟌, 쟌다르크, 쟌다크, 조안, 조안나, 조한나

 


   일명 오를레앙의 처녀로 불리는 성녀 잔 다르크는

1412년 1월 6일 프랑스 동북부 샹파뉴 근처에 있는

동레미에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인 농부의 다섯 자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출생한 시기는 백년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였고,

당시 동레미는 영국군의 침략으로 많은 피해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열심했던 그녀는 1425년 13세가 될 무렵에

대천사 미카엘(축일; 9월 29일)이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축일; 11월 25일)와

안티오키아의 성녀 마르가리타(축일; 7월 20일)와 함께

나타나 부친의 집을 떠나 프랑스 군대의 사령관을

찾아가고 나아가 오를레앙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 군대를

몰아내라는 초자연적인 ‘음성’을 들었다.

그녀는 이 목소리를 하느님이 보내신 것이라 생각하였으며,

그 ‘음성’의 지시에 따라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다는 표시로

순결 서약을 하였다고 한다.

   1428년 5월에 그녀는 샤를 7세를 도와 부르고뉴가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 인해 영국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된

오를레앙 지역을 탈환하고, 내전으로 분열된 프랑스를

국왕의 통치 아래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샤를 7세가 보쿨뢰르에 파견한 장군을 찾아가

프랑스를 위해 싸울 수 있는 허락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잔 다르크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예언대로 샤를 7세의 상황은 더욱 불리해져,

1428년 10월 12일 그의 거점 지역인 오를레앙이 포위되었다.

1429년 프랑스군이 오를레앙 교외의 헤링 전투에서

영국군에 의해 패배하자 그녀는 3월 시농에 피신해 있던

샤를 7세를 찾아갔다.

샤를 6세의 아들인 그는 백년 전쟁에서 영국인들에 의해

프랑스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녀는 그가 못된 인물인줄 알았으나 계시에 따라 그에게

순종하였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사명을 인정하게끔 하여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군사 작전에 나서기 전 푸아티에로 가서 주교와

학자들 앞에서 최종적인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잔 다르크는 ‘음성’의 진실성 여부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그 결과 그 ‘음성’은 사실로 인정되었고, 그녀의 주장에서

이단이나 미신적인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받았다.

이후 그녀는 하느님이 파견한 예언자이자 투사로 알려졌고,

그녀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흰 갑옷을 입고 전투에 참가한 그녀는 1429년 5월 7일

오를레앙에 입성하고 5월 8일에 영국군을 퇴각시킴으로써

프랑스군에 최초의 승리를 안겨주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마침내 1429년 7월 17일 샤를 7세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리게 되었고, 이 때 그녀는 왕 옆자리에 앉았으나

그때부터 왕은 더욱 방자해져서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으고 활동하다가 1430년 4월에

위험에 빠진 콩피에뉴를 구하기 위해 출정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엄청난 액수의 몸값을 받고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그녀는 자신을 이단으로 모는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

틈새에서 자신이 들은 계시가 마귀의 짓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사기극을 벌인 당시의 지도자들은 그녀를 끝내 화형에

처하기로 결정하고, 1431년 5월 30일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교황 칼리스투스 3세는 그녀에 대한 새로운 조사 위원회를

설치해서 조사한 결과, 1456년 7월 잔 다르크에게 화형

판결을 내린 재판을 폐기하고 무효화하는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그녀의 명예 역시 복권되었다.

그리고 잔 다르크는 1909년 4월 18일에야 비로소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0년 5월 1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녀는 프랑스 제2의 수호성인이다.

 
 
 
    ▶페르디난도 3세(5.30)
 
 
성인명 페르디난도 3세(Ferdinand III)
축일 5월 3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활동지역 카스티야(Castilla)
활동연도 1199-1252년
같은이름 페르디난두스, 페르디난드

Charles-Joseph Flipart의 세비야를 탈환한 성 페르디난도 3세(Ferdinandus III)


   중세 후기 에스파냐 북서부에 있던 레온 왕국의 왕

알폰소 9세와 카스티야의 알폰소 3세의 장녀인 베렌가리아의

아들인 성 페르디난도는 살라망카 교외에서 태어나서

18세 때에 카스티야 왕국의 왕이 되었다.

또 그는 1219년에 독일 남서부 슈바벤의 국왕 필립의 딸인

베아트릭스와 결혼하였고,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레온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그는 재임 20년 동안 늘 무어인들과 싸웠으며 우베다,

코르도바, 카디스 그리고 끝내는 세비야에서까지 그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여 안달루시아 지방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그는 지혜롭게 통치하여 뛰어난 왕으로 칭송받았으며

두 나라 간의 내적 평화를 이룩하였다.

   그는 시메네스 대주교를 재상으로 모셨고,

1243년에는 살라망카에 대학교를 세웠으며,

부르고스 대성당을 재건하고,

세비야의 회교 사원을 성당으로 개조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또 아내 베아트릭스가 죽고 난 뒤에

퐁티외의 요안나(Joanna)와 재혼하였다.

그의 장례식 때에 그에게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회의 수도복이

입혀졌고, 세비야 대성당에 안장되어 국민들의 공경을 받아온다.

그는 1655년 5월 31일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