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6월 7일 福女안나, 聖불플라지오 님..등

H-Simon 2010. 6. 6. 12:37

 

 

6월 7일(월)

福女안나, 聖불플라지오 님..
 

      성 바르톨로메오(Bartholomaeus)의 복녀 안나(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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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성 바르톨로메오의)(6.7)
 
 
성인명 안나(성 바르톨로메오의)(Anne of St. Bartholomew)
축일 6월 7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수녀
활동지역  
활동연도 +1626년
같은이름 낸시, 니나, 애나, 애니,

 


   성 바르톨로메우스의 안나(Anna)는 에스파냐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가

위대한 하느님의 종이라고 칭찬하였던 그녀의 특별한 동료였다.

안나는 아빌라에서 4마일 떨어진 알멘드랄에서 농사짓던

페르디난도 가르시아와 마리아 만자나의 딸이다.

20세까지 그녀는 양치기로 일하다가 아빌라의

성 요셉 수도원에 입회 허가를 받아 카르멜회 수녀가 되었다.

   성녀 테레사는 마지막 7년 동안 늘 안나를 곁에 두고

모든 여행도 함께 하였고,

카르멜의 개혁 사업에 있어서도 안나 만큼 성녀를 협력한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수차례에 걸쳐 안나는 검은 수건을 써야한다고 했으나 그 때마다

거절하여 늘 평수녀로 살았다.

성녀 테레사가 마지막 숨을 쉰 곳도 안나의 품속에서였다.

그 후 6년 동안 안나는 아빌라에서 조용히 살았다.

   그때 프랑스에서 맨발의 카르멜 수녀원 설립을 종용하자,

테레사의 후임자인 예수의 안나 수녀는 성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를 포함하여 5명의 수녀를 파견하였다.

그 후 안나는 퐁투아즈(Pontoise) 수녀원의 원장,

그 다음에는 투르(Tours)의 원장이 되었다.

또 네덜란드에 카르멜 수도원을 세웠을 때 안나는

몽스(Mons)로 갔으며, 1612년에는 벨기에 안트베르펜(Antwerpen)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1612년에 안나가 사망하자 2천 명의 주민들이 시신에 달린 묵주에

친구하러 줄을 설 정도로 그녀에 대한 공경은 급속히 일어났다.

1917년 5월 6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불플라지오(6.7)
 
 
성인명 불플라지오(Vulflagius)
축일 6월 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아베빌(Abbeville)
활동연도 +643년
같은이름 불플라기오, 불플라기우스, 불플라지우스, 울피
 


   젊어서 결혼했던 성 불플라기우스(불플라지오)

아베빌의 뤼 마을에서 살았다.

그는 아내와 세 딸과 함께 모범적인 가정을 꾸미고 있었는데,

그 마을의 사제가 급사한 사건으로 인하여 그는 주민들로부터

사목자로 선출되었다.

그러므로 아내의 동의를 얻은 그는 일정한 수업을 받고서

성 리카리우스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아내와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였다.

   그는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자신이 다른 이들을

사목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은수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가끔씩 그에게는 은둔소를 떠나야 한다는 유혹이 되살아나곤

했으나 끝까지 유혹을 이겨내는 지혜와 용기를 얻었다.

 

그는 643년경에 운명했고, 유해는 몽트레유-쉬르-메르에 안장되었다.

울피(Wulphy)로도 불린다.

  
 
 
   ▶바오로(6.7)
 
 
성인명 바오로(Paul)
축일 6월 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활동연도 +350년
같은이름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테살로니카 출신인 성 바오로는 소년 시절부터 알렉산데르

주교의 비서로 일하다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부제로 봉사하였다.

그의 스승이 서거했을 때 성 바오로는 스승의 후임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아리우스파(Arianism) 주교들만의

회의를 소집하여 바오로를 단죄하고 추방해버렸다.

   이때 그는 서방으로 가서 피난처를 구하고 복귀할 기회를

찾았으나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주민들은 그들의 주교를 잃은 보복으로 아리우스파의 장군

헤르모네스의 집을 불태우고 살해하는 등 폭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그는 또다시 아르메니아의 쿠쿠수스(Kukusus)로 유배를 갔는데,

그곳의 지하 감방에서 6일 밤낮을 굶기는

형벌을 받고 목이 졸려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