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5월 27(목) 聖女모나셀라, 聖오스틴 님..등

H-Simon 2010. 5. 26. 09:01

 

 

5월 27(목)

聖女모나셀라, 聖오스틴 ..등

 

 
캔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16.jpg
La Golondrina (제비)
 
 
   ▶모나셀라(5.27)
 
 
성인명 모나셀라(Monacella)
축일 5월 27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녀
활동지역  
활동연도 +590년경
같은이름 멜란젤라, 모나첼라

 


   멜란젤라(Melangella)로도 불리는 성녀 모나셀라의 부친은

아일랜드의 왕이었다.

그녀는 부모의 결혼 강요를 뿌리치고 웨일스 중동부의

포이스 지방으로 도주하여 15년 동안이나 하느님만 의지하며

숨은 생활을 하였다.

 

어느 날 포이스의 왕자가 사냥을 나왔다가 기도하고 있는

성녀 모나셀라가 있는 곳으로 토끼를 추격해갔다.

그 토끼는 그녀의 옷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은 왕자는

성녀를 위해 '영원한 피난처와 거룩한 장소'를 제공하였다.

그 후 그녀는 그곳에서 37년을 지내면서

큰 공동체로 발전했을 때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브루노(5.27)
 
 
성인명 브루노(Bruno)
축일 5월 2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뷔르츠부르크(Wurzburg)
활동연도 +1045년
같은이름  

 


   오스트리아 남부 케른텐의 공작인 콘라트)의 아들로 태어난

성 브루노는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19일)의 조카로서

삼촌을 본받기 위하여 브루노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1033년에 뷔르츠부르크의 주교가 된 후 11년 동안

성공적으로 교구를 인도하였다.

그는 자신의 유산 전부를 성 킬리아누스(Chilianus) 대성당

건축에 기부하였다.

지혜롭고도 학식이 풍부했던 그는 두 황제의 고문을 비롯하여

성서 주해서와 주님의 기도(Pater Noster),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m),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 등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아우구스티노(5.27)
 
 
성인명 아우구스티노(Augustine)
축일 5월 2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선교사, 대주교
활동지역 캔터베리(Canterbury)
활동연도 +604/605년
같은이름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오스틴

 

영국으로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를 파견하는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Gregorius I)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문이나 청소년 시절 혹은 교육과정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다만 그는 이탈리아의 로마 태생으로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축일; 9월 3일)와 친분이 있었고,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던 베네딕토회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595년 그는 이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고, 이듬해에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로부터 앵글로 색슨족을 복음화시키라는

사명을 받고 40명의 수도자들과 함께 영국으로 파견되었다.

성 베다(Beda, 5월 25일)에 의하면 그는 이미 영국에 도착하기

전에 주교로 승품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아를(Arles)의

대주교에 의해 주교 수품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597년 봄에 프랑크 왕국의 도움으로

영국 켄트 왕국의 해안가 타네트(Thanet) 섬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영국에 진출해 있던 선교사들과 켄트의 왕인

성 에텔베르트(Ethelbert, 2월 26일)의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에는 아일랜드 교회와 로마 교회의 관습에 많은

차이가 있어서 선교활동에 장애가 많았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켄트의 수도인 캔터베리에

주교좌를 정하고 활동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와 활동은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다.

수많은 개종자들이 탄생했고 그의 설교와 모범을 보고

성 에텔베르트 왕과 신하들이 597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왕이 하사한 땅 위에 주교좌 성당을 세우고 도시 외곽에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 수도원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베네딕토회 수도원이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켈트(Celtic) 전례를 고수하려는 주교들이

로마 전례의 규율과 관습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여생을 켄트에서 보내면서 런던(London)과

로체스터(Rochester) 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를 임명하였다.

그는 캔터베리의 첫 번째 대주교이자 '영국의 사도'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오스틴(Austin)으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