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복음 말씀 ♥
+.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1-10)
♥ 오늘의 묵상 ♥
사람이면 누구나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랑받고 싶은 만큼 자신의 그림자를 숨기고 싶어 합니다.
여기에서 열등감(콤플렉스)이 생깁니다. 학벌, 신체적 조건, 환경이나 과거의 상처 등이
내면에서 열등감으로 작용하여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합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이 더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 이야기는 열등감과 관련하여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으며, 군중들에게 가려질 만큼 키가 작았다고 소개됩니다.
당시에 멸시받던 세리라는 직업으로 보나, 신체적으로 보나,
그는 온통 열등감을 안고 살았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정을 해서라도
돈을 모아 부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의지하고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돈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돈으로도 그의 열등감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은 공허했고 소외감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가 사는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세리들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동료 세리 마태오도 제자로 부르실 만큼 아무런 편견을
가지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보려고 달려 나갔지만 군중 때문에 볼 수가 없자
나무 위로 올라가서 마침내 예수님을 뵙습니다.
나무에까지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뵙고 싶은 만큼
그는 자기를 이해해 줄 사람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마음을 보시고 그의 집에 머무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관심과 사랑을 받은 그는 회심이 일어납니다.
자캐오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한 것은 더 이상 삶의 근거를
돈에 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내적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내적 자유 때문입니다.
세상의 온갖 질곡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며 살려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우리를 늘 부자유스럽게 하는 내적 열등감을 이겨 내는 것도 포함됩니다.
열등감은 주님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오롯이 나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순간 우리는 내적으로 자유로워지며 열등감은 낫게 됩니다.
이것이 자캐오의 이야기입니다.
성부와 성령과 함께..
2011년 11월 15일
H-Simon
주님이 나를 지켜 주시네.
주님, 저를 괴롭히는 자들 어찌 이리 많사옵니까?
저를 거슬러 일어나는 자들 많기도 하옵니다.
“하느님이 저런 자를 구원하실까 보냐?”
저를 빈정대는 자들 많기도 하옵니다.
주님이 나를 지켜 주시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