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4월29일 시에나의 聖女가타리나님..등

H-Simon 2011. 4. 28. 17:25

 

 

4월29일(금)   

 시에나의 聖女가타리나님..등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가타리나(4.29)
 
성인명 가타리나(Catherine)
축일 4월 29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수녀, 교회학자, 신비가
활동지역 시에나(Siena)
활동연도 1347-1380년
같은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카타리나 베닌카사(Catharina Benincasa, 또는 가타리나)
시에나의 한 염색업자의 25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생기발랄하고 상냥한 아가씨였으므로,
아버지가 항상 점잖게 굴라고 하는 말을 싫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불과 6살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생애를 미리 보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그녀는 부모가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모든 노력에 반항하고,
오로지 기도와 단식에만 전념하였다.

   그녀는 16세 되던 해에 도미니코 3회원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들에 대한 환시는 더욱 잦아졌고,
동시에 악마적인 환시도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나병환자와 같은 절망적인 병을 앓는 환자들을 간호하는 일을 즐겨하였다.
그녀가 받은 초자연적인 선물들로 인하여 열렬한 지지자들이
지나치게 열광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혹시 협잡꾼이 아닌가 하여 고발됨에 따라
도미니코회의 총회 석상에까지 출두한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카푸아(Capua)의 레이몬드 성인이 그녀의 고해신부로 임명되었으나,
곧 그녀의 제자가 되었고, 후일에는 그녀의 전기 작가가 되었다.

   시에나로 돌아온 그녀는
페스트로 황량해진 그 도시와 주민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고,
선고받은 죄수들을 찾았으며,
평화를 전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분쟁을 해결하였다.
그녀는 터키인을 대항하려는 십자군을 모집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XI)를 적극 지원하였고,
1375년에 피사를 방문하는 도중에 오상 성흔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오상이 생전에는 볼 수 없었는데,
임종할 즈음에는 확연히 드러났다고 한다.
그녀는 플로렌스와 그레고리우스 교황간의 불화를 중재하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아비뇽(Avignon)의 교황좌가 1376년에 로마(Roma)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후로는 자신의 신비적인 체험들을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여
성녀 카타리나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137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서거에 즈음하여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가 교황으로 선출됨으로써,
이를 반대하는 일단의 추기경들이 스위스 제네바(Geneva)
로베르투스(Robertus)를 대립교황으로 선출하는 사건으로 큰 분열이 발단되어
여간 혼란스럽지 않을 때,
그녀는 단호히 우르바누스 교황을 지지하여 분열을 종식시켰다.
그녀는 중풍 증세로 고생하다가 며칠 후에 로마에서 운명하였다.

   카타리나는 그리스도인 신비가 중에서도 대가에 속한다.
그녀는 “대화” 외에도 400여 통의 서한들을 남겼다.
1461년에 시성되었고, 1939년에는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1970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하여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25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 딸....

          생가발랄하여 얌전하라는 충고를 받던 어린 아이^^

 

          그러나 겨우 6살에 주님 현존 체험을,

          16세 이후는 주님과 성모님의 환시 가운데

          하느님의 섭리는 감추임이 없었어라.

 

          선택받은 분, 시에나의 성녀가타리나님이여,

          저희가 세속에 매여 어려움에 처할 때

          천상에서의 님의 고결한 기원으로 저희를 도와주소서!..............아멘

       

 

 

 

    ▶후고(4.29)
 
성인명 후고(Hugh)
축일 4월 2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활동지역 클뤼니(Cluny)
활동연도 1024-1109년
같은이름 위고, 후꼬, 휴스

 

성 후고(Hugo, 좌)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근처 세뮈르(Semur)의 달마티우스(Damatius)
백작의 장남으로 태어난 성 후고(Hugo)
15세 때에 프랑스의 베네딕토회 클뤼니 수도회에 입회하여,
 2년 후인 1040년에 첫 서약을 하고 1044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겨우 25세에 불과한 나이로 1049년 1월에 세상을 떠난
성 오딜로(Odilo, 1월 1일) 아빠스를 계승하여 수도회의 아빠스가 된 것이었다.
그의 영향은 수도원 밖에서도 매우 컸다.
그는 아홉 명에 달하는 교황의 고문 역할을 하였고,
클뤼니 수도회는 교황 성 레오 9세(Leo IX, 4월 19일)
성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5월 25일)가 시작한 '그레고리오 개혁'을
충실하게 후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직매매를 근절시키고 성직자의 규율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성 후고는 1050년에 교황 레오 9세와 함께 로마로 와서는
성변화와 유아세례를 반대하여 이루어진
투르(Tours)의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 이단을 단죄하는 교회 회의에 참석하였고,
1057년에는 교황대사로 임명되어 프랑스의 앙리 4세와
헝가리의 안드레아스 사이의 평화 협정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그는 교황 니콜라우스 2세(Nicolaus II)를 도와서 교황 선출에 관한
칙령을 작성하는 등 교회사에 남을 큰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심리적인 직관과 외교적인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더욱 위대한 인물이 된 이로는
성 베드로 다미아니(Petrus Damiani, 2월 21일) 추기경과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7세 등이 손꼽힌다.
1109년 4월 29일 클뤼니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난 그는
1120년 1월 1일 교황 칼리스투스 2세(Callist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굿뉴스 가톨릭 정보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