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1월11일 聖마르티노, 聖바르톨로메오님..등

H-Simon 2010. 11. 10. 16:38

 

 

11월11일(목)

聖마르티노, 聖바르톨로메오님..등

 

  
 

 

 

투르의 성 마르티노(Marti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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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티노(11.11)
 
성인명 마르티노(Martin)
축일 11월 1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투르(Tours)
활동연도 316?-397년
같은이름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투르의 성 마르티노(Martinus)


   헝가리 판노니아(Pannonia)의 사바리아(Sabaria) 태생인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마르티노)는 이교도 장교의 아들로
부모가 파비아(Pavia)로 전속될 때에는 15세였다.
이때 자신의 뜻과는 달리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고
로마(Roma)로 유학을 가서 그곳에서 예비자가 되었다.

   아미앵에서 지내던 337년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거의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면서 성문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한 거지를
만났는데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옷과 무기밖에 없었다.
그는 칼을 뽑아 자기 망토를 두 쪽으로 잘라 하나를 거지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속에서 자기가 거지에게 준 반쪽 망토를 입은 예수가 나타나 “아직 예비자인 마르티누스가 이 옷으로 나를 입혀 주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이 신비 체험 후 마르티누스는 18세 때 세례를 받고 군대에서 제대한 후
푸아티에(Poitiers)의 힐라리우스(Hilarius)를 찾아가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먼저 어머니를 개종시키고 또 수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했고, 일리리쿰(Illiricum)으로 와서는 공개적으로
아리우스파(Arianism)와 싸움으로써 매를 맞고 쫓겨나는 봉변을 당하였다.
그가 이탈리아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아리우스파이던 밀라노(Milano)의
주교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는 잠시 갈리나리아 섬에 숨어 있다가 360년에 프랑스 지방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푸아티에의 주교인 성 힐라리우스로부터 도움을 받고
리귀제에서 은수자가 되었다. 이윽고 다른 은수자들이 그에게 몰려오므로
이 공동체는 갑자기 큰 공동체가 되었는데,
이것이 프랑스에서의 첫 번째 수도 공동체가 되었다.
이곳에서 10년을 지낸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개인생활은 마르무티에(Marmoutier)에서 은수자로서 계속 생활하였다.

   그가 정열적으로 주교직을 수행하니 이교 신전의 파괴와 개종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는 또 계시와 환시로도 유명하며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또한 그는 프리실리아누스 이단을 격렬히 반대하고 격퇴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뒤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저는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그는 프랑스 지방의 최고의 성인이며,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이전에
서방 수도원 제도를 개척한 탁월한 지도자였다.
 
순교자가 아니면서도 성인이 된 최초의 인물인 마르티누스의 경당은
유럽의 주요 순례지이다.
프랑스의 수호성인 중 한 분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바르톨로메오(11.11)
 
성인명 바르톨로메오(Bartholomew)
축일 11월 1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활동지역 그로타페라타(Grottaferrata)
활동연도 +1055년
같은이름 바로톨로매우스, 바르똘로메오, 바르똘로메우스, 바르톨로매오, 바르톨로메우스

 

그로타페라타의 성 바로톨로메오(Bartholomaeus)


   성 닐루스(Nilus, 9월 26일)는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 지방
로사노(Rossano) 출신의 그리스인으로서,
젊었을 때에는 고향에서 세리 일을 맡아 보았고,
젊은 여인과 함께 살았으나 아내는 아니었다고 한다.
 940년에 그 여인과 아이가 죽자 그는 캄파니아(Campania)의 팔마(Palma)에
있는 비잔틴 수도원에 들어가서 40년을 살았다.
그가 유명 인사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뛰어난 선성과 지혜 때문인데,
성 데메트리우스 코로네 수도원의 원장이 되면서부터 더욱 두드러졌다.

   그는 사라센인들의 침략으로 수하 수도자들을 데리고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와 인접한 곳으로 피신하여
벨레루치오(Vellelucio)에 정착하였다.
성 닐루스는 임종하면서 벨레루치오를 자신의 수도원을 위한
새로운 장소로 선포하였고 그곳에서 그로타페라타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그는 그리스 수도자의 아버지로 공경을 받는다.
그의 세 번째 계승자인
그로타페라타의 성 바르톨로메우스(Bartholomaeus, 바르톨로메오)는
성 닐루스가 세운 수도원의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던 그의 수제자였고,
스승과 같이 찬미가를 짓기도 하였다.
또 그는 노련한 서예가였다.
 
 
 
 
 
 
   ▶테오도로(11.11)  
 
성인명 테오도로(Theodore)
축일 11월 1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신학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759-826년
같은이름 데오도로, 데오도루스, 떼오도로, 떼오도루스, 테오도루스

 

성 테오도로 스투디테스(Theodorus the Studites)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태어난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the Studites, 테오도로)는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올림푸스 산의 성인인
플라토(Plato) 원장의 조카이다.
그는 자신의 부친이 비티니아의 사쿠디움(Saccudium)에 세운 수도원의
수련생으로 공부하던 중 삼촌인 성 플라토(Plato)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고
794년에는 플라토를 계승하여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와 플라토는 본처를 버리고 테오도타(Theodota)와 재혼하는
콘스탄티누스 6세 황제의 행위를 맹렬히 비난한 결과
 테살로니카(Thessalonica)로 유배당하였다.
그래서 그는 공동체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로마인이 세운 스투디우스(Studius) 수도원에 정착하였다. 그의 지도로 이 공동체는 비잔틴 수도원의 신기원을 수립할 만큼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두 차례나 유배당하였으며, 더욱이 레오 5세 황제는 성상파괴 정책을
재개하는 등 온갖 내외적 어려움을 극복한 위대한 성인이었다.
성 테오도루스는 속권과 교회의 권리를 구분지어 교회의 독립을 주장했던
인물이며, 성상공경의 정당성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순수한 의미에서의 수도회 개혁자였다.
 
그는 교의에 관한 논쟁적인 글을 비롯하여 교리서, 강론집
그리고 찬미가 등을 남겼고,
 뛰어난 서예가로 알려졌으며 수도자들에게 예술을 장려했던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