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7월 13일 聖女클렐리아, 聖헨리코2세님..등

H-Simon 2010. 7. 12. 13:38

 

 

7월 13일(화) 

 聖女클렐리아, 聖헨리코2세님..등
 
 

성녀 클렐리아 바르비에리(Clelia Barbi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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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렐리아(7.13)
 
성인명 클렐리아(Clelia)
축일 7월 13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847-1870년
같은이름 글렐리아, 끌렐리아, 바르비에리

 


   성녀 클렐리아 바르비에리는 1847년 2월 13일 이탈리아
볼로냐 외곽의 페르시체토에 있는 분드리에 디 산 지오반니라는 마을에서
주세페 바르비에리와 지아친타 난네티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서로 다른 출신을 갖고 있다.
아버지 주세페 바르비에리는 가장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머니 지아친타 난네티는 마을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지역의 의사인 지아친타의 삼촌 집에서 하인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부유한 피에트로 난네티의 딸로 자랐다.
많은 논란 끝에 주세페와 결혼한 지아친타는 노동자의 가난을 받아들이고,
부유한 집에서 나와 시아버지인 산테 바르비에리의 초라한 시골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돌처럼 단단한 믿음과 온전한 그리스도교적 삶
만들어갔다.

   어머니의 소원대로 성녀 클레리아는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녀에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도록
어린 나이부터 가르쳤다.
어느 날 성녀 클레리아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하면 성녀가 되는지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린 클레리아는 바느질과 방적 기술을 익히고
거친 털을 짜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이는 그 지역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1855년 콜레라가 번졌을 때 8살이었던 성녀 클레리아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의사 삼촌의 배려로 성녀 클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은 성당 
근처에 있는 편안한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성녀 클레리아는 하루하루를 더욱 성스럽고 열심히 살게 되었다.
그녀는 집에서 바느질을 하거나 성당에서 기도를 하였다.
보통 성인식 때 첫영성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교리적으로 완벽하게 준비된
그녀는 1858년 6월 17일 11살의 나이로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이 날은 성녀 클레리아의 미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그 날 처음으로 영적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과 성모님의 슬픔은 그녀의 성스러운
영혼을 더욱 고무하였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되었으며 기도와 선행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성광 앞에서 그녀는 부동의 자세로 오로지 기도에 전념하였고
집에서는 힘든 일을 하는 다른 소녀들의 모범이 되었다.
조숙한 그녀는 삼베를 짜는 힘든 일이 주업인 곳에서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기도를 늘 간직하고 있었고 때로는 동료들에게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녀는 세상일에 열심인 마르타는 아니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힘겨운 노동 현장에서 일하면서
그녀의 가냘픈 손은 힘겨운 삶의 흔적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모든 것을 멀리하고 오로지 사랑과 헌신에 몸을 바친 마리아는
아니었지만 잡념을 갖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헌신적인 삶을 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거나 무시했다.
그녀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이 기뻤고
그녀의 기쁨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주로 나타났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그녀를 가장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동료들에게로 이끌었다.
그녀의 강렬한 믿음은 하느님의 가난한 자들에게
그녀의 모든 것을 주게끔 했다.

   이 시기에 교회에는 ‘그리스도교 교리교육 봉사자’라는 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냉담하는 이들을 신앙에로 인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녀의 마을에서는 어느 나이 든 학교 교사가 이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성녀 클레리아는 이 모임에 참여하였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처음에 조교로 들어갔던 그녀는 놀라운 역량과 준비성으로
선임 회원들까지 인도하게 되었다.
제법 솔깃한 청혼을 거절한 젊은 아가씨들은 성녀 클레리아를
그들의 지도자로 뽑고 사도적이고 명상적인 삶을 채택하였다.
 
이 헌신의 삶은 성체성사를 받는데서 비롯되어
인근 마을의 농부와 노동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당시는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정치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기에
그들의 생각이 곧바로 현실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1868년 5월 1일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면서
성녀 클레리아와 그녀의 동료들은 ‘교사의 집’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여
그들의 생각을 현실로 만들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교 교리교육 봉사자회와 공식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이는 후에 그녀가 ‘슬픔의 어머니의 작은 자 수녀회’를 설립하는
초석이 되었다.
 
교사의 집으로 옮긴 후 의심할 여지없이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비범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녀의 기도에 담겨진 믿음과 헌신적인 사랑은 늘 놀라웠다.
그들의 작은 공동체에는 믿음과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 가득했고,
창의력과 상상력이 충만한 선교는 조직을 통한 선교가 아닌 보이지 않는
말씀을 통한 선교였으며 성녀 클레리아는 움직이는 영혼이었다.
 
처음에 설립한 작은 단체가 점점 그 수를 늘려가면서 교리교육과 종교적인
방향성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병든 어린 학생들의 수도 늘어갔다.
사람들은 성녀 클레리아를 점차 믿음의 지도자와 선생님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나이 22세 때의 일이었다.
성녀 클레리아는 수녀회를 설립한 지 2년이 지난 후
잠잠했던 결핵이 재발해 볼로냐에서 선종하였다.

   성녀 클레리아가 설립한 슬픔의 어머니의 작은 자 수녀회는
이탈리아 전역과 인도 그리고 탄자니아까지 확장되어 갔다.
오늘날 그녀의 발자취를 따르는 수녀들은 지속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있으며
300여명이 35개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성녀 클레리아 바르비에리는 
교회 역사상 가장 어린 수도 공동체의 설립자이다.
녀는 1968년 10월 2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9년 4월 9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헨리코 2세(7.13)
 
성인명 헨리코 2세(Henry II)
축일 7월 1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황제
활동지역  
활동연도 973-1024년
같은이름 앙리, 하인리히, 헨리, 헨리꼬, 헨리꾸스, 헨리쿠스

 


   성 헨리쿠스는 973년 5월 6일 바이에른 또는 힐데스하임에서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2세와 부르고뉴의 왕인 콘라트의 딸 기셀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995년에 사망한 부친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4세가 되었고,
998년에는 룩셈부르크의 여백작인 성녀 쿠네군다(3월 3일)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1002년 오토 3세의 사망 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독일 마인츠에서
왕으로 추대되었으며, 1014년에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하였다.
 
   그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는 독일 성직계의 강화와
교회의 개혁과 쇄신이었다.
   성 헨리쿠스는 성녀 쿠네군다와의 혼인 중에 동정을 지켜 자식을 얻지
못했다는 전설도 남아 있을 만큼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했다.
 
그의 스승은 성 볼프강(10월 31일)이었고, 클뤼니 수도원의 기틀을 마련한
성 오딜로(1월 1일)와 리카르두스(6월 14일)는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수도자가 되려고 노력하였지만 직책상 뜻을 이룰 수가 없었으나
그의 신심은 수도자에 못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밤베르크 교구를 설정하고, 그곳을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1024년 7월 13일 괴팅겐 근처의 그로나에서 세상을 떠나
밤베르크의 성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성 헨리쿠스 2세는 1146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에 의해 시성되어,
중세 독일의 왕들 중에서 가장 명예로운 왕이 되었다.

  

 

  ▶실라(7.13)

 
성인명 실라(Silas)
축일 7월 1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사도들의 제자, 증거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세기경
같은이름 실라스, 실바노, 실바누스, 씰라스, 씰바노, 씰바누스

 

사도 성 바오로(Paulus)와 성 티모테오(Timotheus)와 성 실라(Silas)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성 실라는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에 따라 이방인 공동체로 진출하기 위하여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시리아로 파견되었다.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마르코(9월 27일)라는 요한 문제로 언쟁했을 때,
그는 바오로를 수행하여 그의 제2차 전교 여행지인 시리아, 실리시아 그리고
마케도니아를 순회하였다(사도 15,38-40).
성 실라는 필립비에서 사도 바오로와 함께 고발되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으며,
테살로니카에서는 유대인들의 폭동에 직면하였으나
교우들이 그날 밤으로 베레아로 떠나게 주선해 주었다.
 
사도 바오로가 실바누스라고 언급한 사람(2고린 1,19)은
실라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또한 베드로 1서 5장 12절에 언급된 실바누스라는 인물 역시
사도 바오로가 알던 실라와 동인 인물로 여겨진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코린토스 교회의 초대주교였고 마케도니아에서 운명하였다.

 

  

    ▶에우제니오(7.13)
 
성인명 에우제니오(Eugene)
축일 7월 1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증거자
활동지역 카르타고(Carthago)
활동연도 +505년
같은이름 에우게니오, 에우게니우스, 에우제니우스, 유진

 

카르타고의 성 에우제니오(Eugenius)

   카르타고 태생인 성 에우게니우스는 학덕과 성덕, 애덕과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반달족의 왕 후네릭이 승인하는 선거에서 카르타고의 주교로 선임되었는데,
이곳은 거의 50년 동안 주교좌가 공석이었다.
그러나 이 도시의 통치자이며 아리우스파이던 후네릭은 그의 주교직 수행을
금지시키고, 가톨릭 박해를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반달족의 가톨릭 개종을
법으로 금하였다.
또 그는 주교회의를 개최토록 명하였는데,
에우게니우스는 아리우스파 주교들을 등용하려는 국왕의 음모를 미리 알고
회의 참석을 거부하였다.
가톨릭과 아리우스파간의 관계를 토의한다는 명목으로 열린 이 회의는 
484년에 개최되었다.

   이때 왕은 가톨릭 교회들의 약탈을 중지시켰으나,
수많은 가톨릭 주교들을 추방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에우게니우스도 포함되었다.
그는 트리폴리의 사막으로 쫓겨 갔는데,
이곳의 아리우스파 주교인 안토니우스는 그를 아주 가혹하게 대하였다.
484년에 후네릭이 죽자 그의 조카이며 계승자인 곤타문드가 그의 귀향을
 허락하였고, 가톨릭 교회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 왕인 트라시문드는 박해를 재개하여 에우게니우스에게
사형을 선교하였으나 죽이는 대신 그를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로 유배를 보냈다.
그는 이곳의 알비(Albi) 교외의 어느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