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7월 10일 聖女루피나와 聖女세쿤다 님..

H-Simon 2010. 7. 9. 08:32

 

 

7월 10일(토) 

 聖女루피나와 聖女세쿤다 님..
 
 
 

성녀 루피나(Rufina)와 성녀 세쿤다(Secu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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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피나와 세쿤다 (7.10)
 
성인명 루피나(Rufina) / 세쿤다(Secunda)
축일 7월 1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257년
같은이름  

 

Matyrdom of St Rufina(우) and St Seconda(좌)


   성녀 루피나와 성녀 세쿤다(Secunda)는 로마 원로원 의원인
아스테리우스의 딸로서 자매지간이다.
이들은 아르멘타리우스와 베리누스라는 그리스도인과 각기 결혼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돌연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자 이들 두 남자는
자신들의 재산이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배교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 자매들은 그들과 같이 배교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 몰래 로마를 빠져나와 도망쳤지만 이내 그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각되고 말았다.

   그들은 집정관 유니우스 도나투스 앞에 끌려갔다.
갖은 형벌과 위협을 다 받았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먼저 성녀 루피나에게 모진 매를 때리도록 명하였다.
이때 성녀 세쿤다는 이렇게 항의하였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했는데,
왜 언니만 때리느냐?” 그래서
그들은 각기 다른 형태의 고문을 받은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후 플라우틸라라는 어느 미신자가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로마 근교 코르넬리아 가도 근처에 안장하였다.
그곳은 그들이 안장되기 전까지는  '실바 니그로' 즉 검은 숲이라 불렸는데
그 후에는 '실바 칸디다' 즉 흰 숲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이 순교 성인들의 유해는 1154년 교황 아나스타시우스 4세에 의해
라테라노 대성전의 세례소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성녀 루피나와 성녀 세쿤다 자매님.....같은 내용으로 기념함

 
 
마르티알리스(7.10)
 
성인명 마르티알리스(Martial)
축일 7월 1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로마(Roma)
활동연도 +2세기
같은이름 마르시알, 마르시알리스, 마르씨알, 마르씨알리스
 

   성 알렉산데르는 6세기 초 교황 성 심마쿠스(7월 19일)에 의해
로마 미사경본에 이름이 추가된 순교자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역사성은 분명하지 않다.
그는 이탈리아 로마의 살라리아 가도에 있는 묘지에 7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묻혀 있었다.

   이 7명의 순교자들은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 때 이교도의
신상에 희생제물 바치기를 거부하고 순교한
성녀 펠리치타(11월 23일)의 아들들로 별 근거 없이 주장되었다.
그들은 네 번의 재판을 받고 서로 다른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이 7명의 순교자들의 이름은 성 알렉산데르와
성 비탈리스,
성 마르티알리스,
성 야누아리우스,
성 펠릭스,
성 필리푸스 그리고
성 실바누스로 전해졌다.

   그들은 모두 로마 순교록 7월 10일자에 기록된 진정한 순교자들로
로마에 있는 네 개의 묘지에 묻혀 있다.
그러나 그들 서로간의 그리고 성녀 펠리치타와의
연관은 없다.
이 이야기는 구약성서 마카베오 하권 7장에 나오는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를 본떠서 인위적으로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아멜베르가(7.10)
 
성인명 아멜베르가(Amelberga)
축일 7월 1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과부
활동지역 모뵈주(Maubeuge)
활동연도 +690년
같은이름 아말리아, 아말베르가, 아말부르가, 아멜리아


   벨기에 브라반트태생인 성녀 아멜베르가는
 불과 13세의 나이에 비트겔 백작에게 시집을 가서 세 자녀를 낳았는데,
이들이 곧 성녀 구둘라(1월 8일),
성녀 라이넬디스(7월 16일)
그리고 캉브레의 주교 성 에메베르투스(1월 15일)이다.
 
남편 비트겔이 로베스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자
그녀 역시 모뵈주의 수도원에서 같은 규율을 지키는
수녀가 되어 서약을 하였다.
그녀는 여생을 매우 엄격하게 지내다가 남편이 운명한 후
그녀 역시 사망하여 남편 옆에 묻혔다.
 
그녀는 아말부르가, 아말베르가, 아말리아, 아멜리아( 등으로도 불린다.

 

   ▶안토니오 페체르스키(7.10)
 
성인명 안토니오 페체르스키(Anthony Pechersky)
축일 7월 1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러시아(Russia)
활동연도 983-1073년
같은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러시아의 성 안토니오 페체르스키(Antonius Pechersky, 우)와
성 테오도시오 페체르스키(Theodosius Pechersky, 좌)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체르니고프 부근 루베크에서 태어난
성 안토니우스 페체르스키는 젊은 시절 초기 이집트의 수도자들이
했던 것처럼 살기 위해 은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을 위한 교육이 절실함을 깨닫고
그리스의 아토스 산으로 갔다.
그는 여기서 바다 절벽 위에 세워진
에스피그메노우 수도원과 관련을 맺고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몇 년을 살다가 수도원장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서
은수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세우라는 명을 받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러시아로 돌아온 성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아토스 산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평화롭고 고독한 생활방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키예프의 드네프르 강 언저리의 동굴 안에 자신의 은둔소를 세웠다.
그의 지혜와 성덕은 은수 생활을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얼마
지나지 않아 키예프의 동굴들(키예프-페체르스카야-다우라)은 빈곳이 없을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농노이든 자유인이든 상관없이
좋은 지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인을 위하여 러시아인이 세운
첫 번째 러시아 수도원이 세워졌던 것이다.

   샤슬라프 공주는 성 안토니우스에게 동굴 부근의 땅을 주었고
그는 그곳에 수도원과 성당을 세웠다.
그러나 귀족들의 논쟁에 의해 그는 그곳을 떠나
체르니고프에 또 다른 수도원도 세웠다.
 
페체르스카야 라우라의 자기 동굴로 다시 돌아와서 여생을 수덕하며
엄격하게 살다가 선종하였다.
그는 성 테오도시우스 페체르스키와 더불어
 러시아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는 동굴의 성 안토니우스라고도 불린다.

 

   ▶엠마누엘 루이스(7.10)
 
성인명 엠마누엘 루이스(Emmanuel Ruiz)
축일 7월 10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860년
같은이름 에마뉘엘, 임마누엘

 

 복자 엠마누엘 루이스(Emmanuel Ruiz)와 동료 순교자

 


   크림 전쟁 후 파리의 의회는 터키에 대하여 오토만 황제의 어떤 개혁,
즉 터키 내의 소수집단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올바른 대우를 요구하였고,
1856년에는 술탄이 칙령을 내려 제국 내의 모든 신하들은
인종과 종교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자유가 확대되고 화해 무드가 조성되던 중,
1860년에 어느 청년 그리스도인과 힌두교인 사이의 논쟁이 화근이 되어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그 해 5월 30일과 6월 26일 사이에 레바논 전역에서
6천 명 이상의 신자들이 살해되었다.
잘레에서는 5명의 예수회원이 목 졸려 죽었고, 다일 알-카말에서는
마로니트 수도원의 원장이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만행 끝에 순교하였고
그곳의 수도자 20명은 도끼에 맞아 죽었다.
7월 9일에는 이 불길이 다마스쿠스로 옮겨 붙었다.

   그 당시 엠마누엘 루이스는 프란치스코회의 원장이었는데
모아브인들의 급습을 받고 성당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죽는다.”
고 말하고 제대 앞에서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다.
 
또 프란치스코 마삽키는 70세 된 노인이자 그 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분으로 프란치스코회를 적극 후원하였다.
이들은 1926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서 복자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