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7월 9일 聖女베로니카 지울리아니 님..등

H-Simon 2010. 7. 8. 06:21

 

 

7월 9일(금)

聖女베로니카 지울리아니 님..등
 
 
  
 

성녀 베로니카 지울리아니(Veronica Giuli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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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로니카 지울리아니(7.9)
 
성인명 베로니카 지울리아니(Veronica Giuliani)
축일 7월 9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수녀원장, 신비가
활동지역  
활동연도 1660-1727년
같은이름 베로니까, 베로니카, 율리아니

 


   이탈리아 우르비노의 메르카텔로 출신인 성녀 베로니카 지울리아니는
우르술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어릴 때부터 신심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수도생활을 꿈꾸었다.
그래서 결혼하라는 부친의 권유를 끝까지 물리치고
1677년에 치타 디 카스텔로의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베로니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는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하기 시작하여
1697년에 오상을 받았다.
치타 디 카스텔로의 주교가 개인적으로 조사한 결과
그녀의 오상은 진실하다고 선언하였다.
그녀는 관상생활과 활동을 잘 조화시켰고 34년 동안이나 수련장직을 맡았으며,
1716년에는 원장으로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책임을 다 하였다.
 
성녀 베로니카는 여러 가지 초자연적 은혜를 받은 18세기의
위대한 신비가로 유명하다.
그녀는 1804년 복자품에 올랐고,
183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니콜라오 픽크(7.9)
 
성인명 니콜라오 픽크(Nicholas Pieck)
축일 7월 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고르쿰(Gorkum)
활동연도 +1572년
같은이름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픽크

 


   네덜란드 고르쿰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의 원장이던
성 니콜라우스 픽크는 칼뱅파의 개종을 주로 담당하며
4명의 다른 사제들과 힘을 합쳐 활동하였다.
 
칼뱅파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 그들도 잡혀 고문을 당하였는데,
성체와 교황의 수위권을 배반하면 살려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 제안을 거부하자, 니콜라우스와 다른 18명의 사제,
수도자, 교우들이 브리엘의 폐허가 된 루겐 수도원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들은 186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고르쿰의 19명의 순교자로서
성인품에 올랐다.
 
 
  ▶레오 이냐시오 만진(7.9)
 
성인명 레오 이냐시오 만진(Leo Ignatius Mangin)
축일 7월 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중국(China)
활동연도 +1900년
같은이름 만진,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오

 

중국의 성 레오 이냐시오 만진(Leo Ignatius Mangin)


   4명의 예수회원과 52명의 중국인 평신도들이 1900년에 순교하였는데,
레오 이냐시오 만진은 그들의 대표자였다.
 
그는 2000년 10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중국 교회 120명의
성인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자오롱(7.9)
 
성인명 아우구스티노 자오롱(Augustin Zhao Rong)
축일 7월 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중국(China)
활동연도 1746-1815년
같은이름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조영

중국의 성 아우구스티노 자오롱(Augustinus Zhao Rong) 사제와 동료 순교자

 


   성 자오롱은 1746년 중국 귀주(貴州)에서 태어났으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누스(오스틴)이고 원래 성은 주(朱) 씨였다.
 
그는 젊은 시절 좀 방탕한 생활을 했고 20세 때에 옥졸(獄卒)이 되었다.
그 당시는 천주교가 사천(四川) 지방에 막 전해졌을 때라 신자들이
조금씩 생길 때였는데,
1772년 갑자기 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들은 잡혀가 감옥에 갇혔다.

   2년 뒤 매 신부라는 선교사가 새 영세자들을 격려하러
그 지역에 갔다가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매 신부가 열정적으로 진리를 전파하는 모습에 많은 죄수들이
감동했는데, 옥졸로 있던 주영(朱榮) 역시 그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똑똑하고 아는 것도 많아 며칠 안 돼 교리를 배워 믿게 되었다.
나중에 매 신부가 감옥에서 나갈 때 그를 배웅하면서도
계속 교리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매 신부는 1776년 그에게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견진성사도 베풀었다.

   매 신부는 그가 신앙심이 굳건한 것을 보고 많은 일을 부탁했고
라틴어도 가르쳤다.
그리고 그에게 성인들의 책을 많이 읽도록 했다.
다른 신부 한 명도 그의 믿음을 보고 위독한 아이들에게
유아세례를 주게 하는 등 많은 일을 부탁했다.
그러고는 성실한 그의 성격과 굳건한 믿음을 보고
주교에게 사제서품을 청했다.
그래서 1781년 음력 5월 10일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5세였고 성도 조(趙, Zhao) 씨로 바꿨다.

   사제가 된 뒤에 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오롱은 착실하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하며 간절한 태도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박해를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1815년 1월 27일 향년 69세의 나이로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다.
그는 1900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00년 10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19명의 동료 중국 순교자들과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프란치스코 데 카필라스(7.9)
 
성인명 프란치스코 데 카필라스(Francis de Capillas)
축일 7월 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중국(China)
활동연도 +1648년
같은이름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중국의 성 프란치스코 데 카필라스(Franciscus de Capillas)


   성 프란치스코는 에스파냐 바야돌리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7세 때에 도미니코의 설교자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필리핀 선교를 자원하여 1631년 마닐라에서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그 후 10여 년 동안 루손 섬 북부의 카가얀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아주 엄격한 생활을 하였고, 훌륭한 표양을 보이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나무 침대에서 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 잠을 잤다.

   1642년 그는 중국 선교단에 합류하였다.
당시는 중국 명(明) 나라 말기로 국경 지방에는 타타르족의
급습이 잦았고, 또 토착 종교와의 갈등이 심하였기 때문에
그곳 종교 지도자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909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2000년 10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중국 교회
120명의 성인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성인의 옛 축일은 1월 15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