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5월 23일(성령강림대축일) 聖요한세례자 데 로사, 聖이보 님..등

H-Simon 2010. 5. 22. 20:22

 

   5월 23일(성령강림대축일)
聖요한세례자 데 로사, 聖이보 ..등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같은 갓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위에 내렸다." (사도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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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세례자 데 로시(5.23)

 

 

 

 

 

 

 
성인명 요한 세례자 데 로시(John Baptist de Rossi)
축일 5월 2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활동지역  
활동연도 1698-1764년
같은이름 밥띠스따, 밥티스타, 밥티스트,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이탈리아 제노바의 볼타지오 태생인 성 요한 세례자 데 로시는

그 지방에서 존경받던 집안의 후손으로 10세 때에

어느 귀족 집안에 들어가서 교육을 받았다.

 

후원자 집에서 3년을 지낸 어느 날 그 집에 카푸친회의

두 수도자가 왔다.

그들은 그의 사람 됨됨이를 보고 그를 초청하였다.

그래서 그는 13세 때에 로마 대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721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학생 때부터 병원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40년 동안이나

인근의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보살폈다.

그러나 그의 음식은 보잘 것 없었고 의복도 남루하였다.

 

그는 또한 고해신부로도 유명했기 때문에 고백자들이 줄을

이었지만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66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윌리엄(5.23)
 
 
성인명 윌리엄(William)
축일 5월 2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로체스터(Rochester)
활동연도 +1201년
같은이름 굴리엘모, 빌리암, 빌헬름, 윌리암
 


   스코틀랜드 퍼스 태생인 성 윌리엄은 젊은 시절 회개의 체험을

 한 후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들을 돌보는데 자신을 헌신하였다.

한 번은 성당 앞에 두고 간 한 갓난아기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여 키웠다.

1201년 그는 캔터베리 또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자

계획하고 자신의 양자를 동행하였다.

 

그런데 로체스터 인근에 도착했을 때 그 양자는 지름길로

인도한다며 그를 이끈 후 얼마 되지 않는 그의 재물을 훔치고자

그를 살해하였다.

성 윌리엄의 유해는 한 미친 여자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때 그녀의 정신이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외에도 다른 기적들로 인해 그는 사람들로부터 순교자로

불리게 되었고, 마침내 그의 유해가 로체스터 주교좌 대성당에

모셔지게 되었다.

그에 대한 공경은 1256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 의해

승인되었고, 지금도 로체스터 대성당에는 그의 경당이 있다.

그는 빌리암으로도 불린다.

 
 
 
    ▶이보(5.23)
 
 
성인명 이보(Ivo)
축일 5월 2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샤르트르(Chartres)
활동연도 1040-1115년
같은이름  

 


   프랑스 보베 태생인 성 이보는 파리와 노르망디의

베크 수도원에서 캔터베리 복자 란프랑코(Lanfranc, 5월 24일)의

문하생으로 수학하고 생캉탱(Saint-Quentin)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엄률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성경과 신학 그리고 교회법을 가르치던 중

1078년경에 원장이 되었고, 이어 1091년경에는 샤르트르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국왕 필립 1세의 고문관이 되었으나 왕이 자신의

왕비인 베르타와 이혼하려는 계획을 알고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사임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투옥되었다.

그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의 중재로 석방되었는데,

그때 마침 국왕의 첫 부인인 베르타가 사망했기 때문에

국왕과 화해할 수 있었다.

 

그는 당대의 뛰어난 지식인이었다.

또한 교회의 성직매매를 공식적으로 항의했던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많은 서한과 강론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이보(Yvo)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