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5월 21일 聖 에우제니오, 聖 고드릭 님..등

H-Simon 2010. 5. 20. 16:06

 

   5월 21일(금)
聖 에우제니오, 聖 고드릭 님..등
 
 
 
마르세유의 성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드(Eugenius de Mazenod)
 16.jpg

                  노래 ; 김효재님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드(5.21)  
 
 
성인명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드(Eugene de Mazenod)
축일 5월 2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설립자, 주교
활동지역 마르세유(Marseille)
활동연도 1782-1861년
같은이름 에우게니오, 에우게니우스, 에우제니우스, 유진

 


   성 카롤루스 요세푸스 에우게니우스 드 마제노드는

1782년 8월 1일 프랑스 남부 액상 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프랑스의 중산층으로 수녀원 부속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부유했고, 아버지는 귀족 출신으로 전통

교육을 받았으나 가난했다.

그들의 혼인생활과 성 에우게니우스의 가정생활은

지속적인 집안싸움과 외할머니의 간섭,

신경과민의 이모에 의해 꽤나 괴로웠다.

   1790년 12월 13일, 8살의 성 에우게니우스와 그의 가족은

프랑스 대혁명을 피하여 이탈리아로 피신했다.

그의 가족들은 프랑스의 니스, 이탈리아의 토리노,

베네치아, 나폴리, 팔레르모에서 11년을 생활했다.

성 에우게니우스는 매일의 생활을 통해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배웠으며, 대부분의 교육은 베네치아의 본당신부인

바르톨로 지넬리(Bartolo Zinelli) 신부로부터 받았다.

팔레르모에서는 젊고 부유한 이탈리아 귀족들과 함께

방탕하고 세속적인 삶을 살았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끝나고 어머니는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아버지는 외면상의 정치적인 이유로 이탈리아에 남았다.

아버지가 1802년 가족 소유의 땅을 회수하고자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성 에우게니우스는 부모님을 재결합시키고자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19세기 초반에 드문 사건인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다.

부모로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유년시절과

지속적인 가정불화와 가정의 파괴는 성 에우게니우스로 하여금

도움이 필요한 가정과 그 구성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했다.

   수년 동안 성 에우게니우스는 혼자 괴로워하면서 팔레르모에서

경험했던 세속적인 삶에 한 손을 담그고,

다른 한 손은 베네치아에서 바르톨로 지넬리 신부와 함께

경험했던 종교적 삶의 아름다움에 담근 채 생활했다.

해답을 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1805년 수감자들에게

교리교육을 하고, 함께 노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하느님께서 승리하시어, 1807년 성 금요일에 십자가 발치

아래에서 신비 체험을 한 성 에우게니우스는 충만한 하느님

사랑의 힘에 의해 감동을 받고 1808년 파리에 있는

성 술피스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811년 29세의 나이로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귀족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수품 직후 아미앵의

주교 총대리직을 제안받았으나,

이를 포기하고 액상 프로방스의 본당 신부를 택하여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일하고 선교하였다.

그는 상류층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아닌 지방 사투리를

사용해 그들을 교회로 끌어들였다.

그는 병자들, 수감자들,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였으며

 젊은이들을 보살폈다.

교도소에서 사목할 때 그는 병에 감염되어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성 에우게니우스는 자기 주변에 성직자와 평신도를 막론하고

많은 추수꾼들을 모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의 카르멜회 수도원에서 일하였고,

그들 중 성직자들은 지역 전체에 걸쳐 본당 업무를 수행하며

프로방스의 선교회를 형성하였다.

이 작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그 명성이 퍼져나가 다른

지역에서도 그들을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성 에우게니우스는 공식 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826년 2월 17일에 교황 레오 12세로부터

새 수도회인 오블라티 선교 수도회

(원명 : 원죄 없으신 마리아 봉헌

선교 수도회)의 설립을 승인받았다.

   성 에우게니우스는 계속해서 선교사로 남고자 했지만

교회는 그가 설립한 작은 수도회의 발전을 확실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그는 1823년 마르세유의 총대리로 임명되었고,

1832년 10월 14일에는 이코시아의 명의주교가 되었으며,

1834년에 보좌주교가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그를 1837년 12월 24일에

프랑스 마르세유의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3개의 본당을 설립했으며, 50여개의 성당을 건축하거나

재건하고 은퇴하거나 박해당한 사제들을 돌보았으며, 교계

규율을 재건하고 젊은이들을 위한 교리 교재를 개발하였다.

그는 또한 33개의 수도회들을 교구로 받아들였고, 교구 사제의

숫자를 두 배 이상으로 늘리며 모든 서품식을 집전하였다.

   성 에우게니우스 주교는 본당들을 재정비하고 교육에

있어서의 정부의 독점을 약화시키고자 남몰래 노력하였다.

교황직에 대한 적극적 옹호자였던 그는 교회의 일에 대한

정부의 개입에 대항해 싸웠다.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교황의 선포에 공적으로

찬성했으며 그 교리를 널리 퍼뜨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25권에 달하는 저서를 썼다.

복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마르세유의 대주교로 승품된

그는 1856년에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원로원 회원이 되었고,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1859년에는 추기경직을 제안받았다.

1841년 12월 2일 성 에우게니우스 주교의 첫 선교사들이

캐나다에 진출하였고,

그가 선종할 당시에는 10개국에서

선교하는 6명의 수도회 주교와 400명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오늘날 68개의 나라에 5,0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이 선교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성 가롤로는 1861년 5월 2일 마르세유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1975년 10월 19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5년 12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모든 가정의 수호성인이다.

 
 

  ▶고드릭(5.21)

 
 
성인명 고드릭(Godric)
축일 5월 2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핀칼레(Finchale)
활동연도 1065-1170년
같은이름 고드리꼬, 고드리꾸스, 고드리코, 고드리쿠스

 


   영국 동부 노퍽(Norfolk)의 월폴 근교에서 앵글로 색슥족

자유민 농부의 세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성 고드릭은 십대에

가족을 떠나 행상을 하며 자신의 야망을 키워갔다.

그는 행상뿐만 아니라 선원으로도 일하며 영국제도의 동부 해안과

유럽대륙까지 오가며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팔아 이미 삼십대에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 그의 생활은 종교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음주와 싸움에 능한 호색가이자 때로는 해적질까지도

일삼는 사람으로 동시대의 기록에 언급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항해 중 가끔 정박했던 린디스파른 섬의

수도원을 방문하여 그곳의 주교인 성 쿠트베르투스와

수도자들의 삶을 보고 감동하여 회개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예루살렘 성지와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그리고 프로방스의 성 에지디우스 경당과 로마를 순례한 후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스스로

엄격한 삶을 살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40세에 이르러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재산을 버리고

은수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엘릭이라는 은수자와 함께 2년 동안 은수생활을

하다가 1108년 엘릭이 죽은 후 더럼(Durham) 부근의 핀칼레에서

거의 60여 년간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는 처음에는 동굴에서 생활하다가 후에는 작은 오두막에서

거친 옷을 입고 맨발로 생활하는 등 엄격한 보속의 삶을 살며

높은 성덕을 쌓았다.

그는 야생동물과도 친밀하게 지냈고,

예언과 환시 그리고 천리안의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또한 리보의 성 아일레드(Aelred, 1월 12일),

뉴민스터(Newminster)의 성 로베르투스(Robertus, 6월 7일),

캔터베리의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12월 29일)

그리고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게 자문을 하곤 했다.

그는 중세 영어로 시를 지었고,

그 중의 하나는 영어로 기록된 시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정시의 한 예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고드리쿠스(Godricus)로도 불린다.

 
 
   ▶크리스피노(5.21)
 
 
성인명 크리스피노(Crispin)
축일 5월 2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활동지역 비테르보(Viterbo)
활동연도 1668-1750년
같은이름 크리스삐노, 크리스삐누스, 크리스피누스, 크리스핀

 


   이탈리아 라치오(Lazio) 지방의 비테르보 태생인

피에트로 피오레티(Pietro Fioretti)는

어려서부터 성모님을 특별히 공경하였다.

그는 삼촌의 지도하에 견습 제화공으로 있던 중 수도생활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꼈다.

그는 25세 때까지 구두 수선하는 일을 하다가 1693년경

오르비에토(Orvieto)에서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크리스피누스(크리스피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성 크리스피누스는 수도원의 천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비테르보에서는 정원사,

톨파(Tolfa)에서는 주방 요리사로서  봉사했다.

톨파와 브라치아노에서 유행병이 돌 때에는 그의 주위에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요르비토에서 재무를 담당하였는데,

사실 이런 일보다는 그의 기적과 예언 그리고 지혜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는 1750년 5월 19일 로마(Roma)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806년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2년 6월 2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시성식 중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단순하게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지상 순례의

         참된 가치를 이해한 아무 경력도 없는 겸손한 형제”

라고 칭송하였다.

  
 

 

   ▶호스피시오(5.21)
 
 
성인명 호스피시오(Hospitius)
축일 5월 2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580년경
같은이름 호스삐씨오, 호스삐씨우스, 호스피시우스, 호스피씨오, 호스피씨우스, 호스피티오, 호스피티우스

 


   성 호스피티우스(호스피시오)는 프랑스 방리유(Banlieu) 부근,

오늘날 성인의 이름을 딴 도시(Cap-Saint-Hospice)에서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는 오래되어 폐허가 된 탑 위에서 사순시기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철제 사슬을 몸에 두르고

오직 빵과 대추야자만을 먹으며 살았다.

 

그는 예언과 기적의 선물을 받았다.

성인의 유해는 5월 21일에  레렝스 수도원으로 옮겨졌는데,

이날을 현재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축일; 11월 17일) 주교는

자신의 저서에서 성 호스피티우스를 언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