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5월19일 聖첼레스티노5세, 聖아우구스티노 노벨로 님..등

H-Simon 2010. 5. 18. 14:43

 

 
5월19일(수)
聖첼레스티노5세, 聖아우구스티노 노벨로 ..등
 

 

 

바르톨로메오 로마노의 교황 성 피에트로 첼레스티노 5세(Coelestinus V)

16.jpg

  내 영혼의 노래

  
 
 
 
 

 

   ▶첼레스티노 5세(5.19)
 
 
성인명 첼레스티노 5세(Celestine V)
축일 5월 1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교황
활동지역  
활동연도 1210-1296년경
같은이름 셀레스틴, 첼레스띠노, 첼레스띠누스, 첼레스티누스, 켈레스티노, 켈레스티누스, 코일레스티노, 코일레스티누스

 


   이탈리아 중부 아브르초의 이스네리아에서 출생한

피에트로 델 모로네는 시골 농부의 열두 아들 가운데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는 20세 되던 해에 은수자가 되었다가 사제가 되려고 자신의

움막을 떠나 마침내 로마에서 서품을 받았다.

1246년에 그는 파이졸라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고,

술모나 근방의 몬테 모로네에서 은수생활을 계속할 허락을 받았다.

많은 군중들을 피하여 5년을 이렇게 살다가 2명의 동료와 함께

더욱 엄격한 생활을 하려고 몬테 마엘라로 숨어들었으나,

그가 처음으로 은수자들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당시에는

수도원이 된 몬테 모로네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그는 매우 엄격한 규칙을 적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274년 그는 자신의 은수자 공동체를 첼레스티누스회라는

이름으로 승인을 받았고, 교황 니콜라우스 4세의 서거 후에

정치적인 알력 때문에 2년간의 교황직 공백 기간이 발생했을 때

추기경들에게 위협적인 언사로 새 교황을 즉각 선출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추기경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84세의 노령인 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더 이상 교황직을 공백으로 둘 수가 없어서 그는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고 1294년 8월 29일 코일레스티누스 5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올라 혼란하던 교회의 방향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성 코일레스티누스는 건강과 직무의 과중함을 이유로 들어

1294년 12월 13일에 교황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간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가예타니 추기경이 그를 승계하여 보니파티우스 8세로 교황좌에

올랐으나, 선임자의 높은 인기가 수많은 지지자들을 만들어 그를

복위시키려는 운동으로 번지자 그는 성 코일레스티누스 5세를

아나니 근교의 푸모네성(城)에 감금하였다.

성 코일레스티누스는 그 성에서 10개월 만에 운명하였다.

그는 1313년 교황 클레멘스 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아우구스티노 노벨로(5.19)
 
 
성인명 아우구스티노 노벨로(Augustine Novello)
축일 5월 19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총장
활동지역  
활동연도 +1309년
같은이름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타오르미나에서 태어난 마태오는

볼로냐에서 수학하여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법률을 가르치는 등

화려한 경력의 소지자였다.

그는 시칠리아의 국왕 만프레드의 수상이 되었으나 베네벤토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때 한 수도자가 만일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봉헌한다면

완쾌되리라는 약속을 했는데, 이것이 사실로 나타나자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평수사로 입회하여

아우구스티누스 노벨로라는 수도명을 택했다.

   후일 교황 니콜라우스 4세는 그를 교황청의 고해신부로

임명했고,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는 그를 시에나의 교황대사로

임명하였다. 1298년 아우구스티누스 노벨로는 수도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지만 2년 뒤에 은퇴하고 자신이 세운

산 레오나르도(San Leonardo) 은둔소에 숨어 여생을 마쳤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59년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교회미술에서 그는 책을 들고 있고 천사로부터 귓속말을 듣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승으로 표현된다.

  

 

 

 

 

   ▶둔스타노(5.19)
 
 
성인명 둔스타노(Dunstan)
축일 5월 1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대주교, 수도승
활동지역 캔터베리(Canterbury)
활동연도 910-988년
같은이름 던스딴, 던스탄, 둔스타누스

 


   영국 글래스턴베리의 발톤스버러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성 둔스타누스는

그곳의 아일랜드계 수도자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청년이 되어서는 애덜스턴의 왕궁에 들어갔으나

934년경에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었고,

939년에는 윈체스터의 주교이자 자신의 아저씨인

성 알페기우스(축일;3월 12일)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고향에서 얼마동안 은수자로 생활하던 성 둔스타누스는

국왕 에드먼드의 부름을 받고 궁중으로 들어갔다가

943년에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수도원을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시켰고 또 다른 많은

수도원을 활성화하는데 큰 몫을 하도록 운영하였다.

그는 에드먼드 국왕이 뜻밖에 살해되었을 때에 국왕의 형제인

에드레드가 왕좌로 나아가는데 자문관이 되었으며, 그의

도움으로 모든 수도원들의 원대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 세속적인 정치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고 색슨족의

부도덕성을 들추어냄으로써 색슨 귀족들의 미움을 받기도 했고,

데인인과의 평화 정착에도 기여하였다.

   그런데 955년 국왕 에드위가 사망한 후 그의 조카인

에드위가 국왕직을 승계하면서부터

그 왕은 성 둔스타누스의 가장 큰 적이 되었다.

새 국왕은 성 둔스타누스의 재산을 압류하고 그를 왕국에서 추방하였다.

그래서 성 둔스타누스는 플랑드르의 겐트로 갔으나

국왕의 동생인 에드가에 의해 에드위가 축출되면서 영국으로

되돌아왔고 곧이어 캔터베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새 국왕과 그는 국가와 교회의 개혁을 꾀하였다.

   성 둔스타누스는 교황 요한 12세에 의하여 교황대사로

임명되면서부터 성 에텔볼두스(축일; 8월 1일)와

성 오스왈두스(축일; 2월 28일)와 함께 교회 규율을 쇄신하기

시작하였고, 이전에 덴마크 사람들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수많은 수도원들을 재건하였다.

성 둔스타누스는 국왕 에드가의 자문관으로 16년 동안 있으면서

그의 잘못을 발견하는 즉시 꾸짖고 진언을 올렸다.

그 후 그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캔터베리로 돌아왔고 대성당 학교에서

교육에 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성 둔스타누스는 영국 수도원의 재건자였다.

또한 그는 유명한 음악가로서 하프를 연주하거나 찬미가를

작곡하기도 하였고 숙련된 철공예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갑옷 제조자, 금세공인, 자물쇠 제조자 및 보석

공예가들의 수호성인이다.

 

 

 

 

 

    ▶알퀴노(5.19)
 
 
성인명 알퀴노(Alcuin)
축일 5월 19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수도원장
활동지역 요크(York)
활동연도 735-804년
같은이름 알뀌노, 알뀌누스, 알퀴누스, 알퀸, 앨퀸
 


   영국의 요크에서 출생한 알퀴누스(알퀴노)는 고향의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에드베르투스의 지도하에 수학하고 부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767년경에 주교좌성당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의 지도하에 이 학교는 학문의 전당으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로마를 방문한 후 파르마에서 샤를대제를 만났고,

그의 초청을 받아 781년에 독일 아헨의 궁중에 학교를 세우고

왕의 스승이자 고문이 되었다.

796년에 그는 샤를대제에 의해 투르의 성 마르티누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그 이후 페리에르, 트루아,

코메리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주도하는 힘이자 정신이었고,

프랑크 왕국의 왕실을 유럽 문화와 학문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는 제국을 통하여 문맹을 퇴치하였고, 초급 교육제도를

신설했으며, 7과목을 배우는 고등 교육제도,

삼학(문법, 수사, 논리)과 사학(산술, 음악, 기하, 천문학)을

근거로 한 교육제도를 만들어 중세 유럽 교육제도의

기반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고문 사용을 장려했던 알퀴누스는 뛰어난 신학자로서

794년 프랑크푸르트 교회회의에서 단죄된 그리스도 양자론

이단을 반박하였다.

그는 성경 주해서도 저술하였고 지금도 수사학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요약의 저자로서 놀라운 언어구사와 함께

수많은 편지들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크게 발전시킨 학교 가운데 하나인

투르의 성 마르티누스에서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이 공식적으로 승인된 바는 없으나 흔히

복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이보 헬로리(5.19)
 
 
성인명 이보 헬로리(Ivo Helory)
축일 5월 1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증거자, 법률가
활동지역 케르마르틴(Kermartin)
활동연도 1253-1303년
같은이름  

 

야코포 다 엠폴리의 과부와 고아를 보호하는 성 이보 헬로리(Ivo Helory)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의 케르마르틴에서 영주의 아들로

태어난 성 이보 헬로리는 그곳에서 자랐으나,

장성한 후에는 파리에서 신학과 교회법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고

오를레앙에서는 민법을 공부하였다.

브르타뉴로 돌아오던 길에 그는 렌과 트리기에의 교회법원과

사회법정에서 판사가 되었는데, 주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그리고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이주해 온 난민들을 도왔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란 별명을 얻었다.

   1284년에 그는 사제로 서품되어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는 구호소를 세워 병든 이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설교 능력 또한 비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일생 동안 엄격하고 청빈한 삶을 살다가 주님

승천 대축일 전야미사 강론을 마친 후에 선종하였다.

그는 1347년 교황 클레멘스 6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법률가의 수호성인이다.

 

 

 

 

 

    ▶테오필로(5.19)
 
 
성인명 테오필로(Theophilus)
축일 5월 1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활동지역 코르테(Corte)
활동연도 +1740년
같은이름 떼오필로, 떼오필루스, 테오필루스

 


   성 테오필루스(테오필로)는 이탈리아 서쪽 프랑스 남부에 있는

코르시카 섬의 작은 마을인 코르테에서 태어났고

본래의 이름은 비아지오 아리기(Biagio Arrighi)였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깊은 신심을 길렀는데,

주일이면 성당에서 들은 강론을 집에서 되풀이 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15세의 나이로 카푸친회에 입회 신청을 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다가 2년 뒤인 1693년에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면서 테오필루스(하느님의 벗이라는 뜻)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로마와 나폴리에서 사제 수업을 마치고 1700년에

사제가 되었다.

1705년 그는 선교 사제로 임명되면서부터 놀라운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는 참으로 설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작은 형제회 내부의 개혁과 쇄신을 위해서도 열성을

갖고 활동하였다.

그는 푸체치오에서 선종하였고, 1930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