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3일(토-복되신 동정녀)
福女마르가리타, 聖헨리코 소소님..등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이탈리아의 라벤나 교외 루시(Russi)에서 태어난 마르가리타는 태어난 지
불과 며칠 만에 시력을 잃고 완전한 맹인이 되었지만,
성장한 뒤부터는 혼자서도 성당을 찾아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가 보고자 하면 무엇이든지 볼 수 있다”고들 하였다.
어릴 적부터 이런 시련 외에도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자발적으로 고행을 하고,
자신이 불우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자선활동을 끊임없이 계속하였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영적 지도를 받으려고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세속에 살면서 수도자의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을 모아 공동체를 세웠다.
그리고 성 히에로니무스 말루셀리의 도움으로 그녀가 직접 회헌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단체는 영구히 뿌리내리지는 못하였다.
마르가리타의 사후 말루셀리는 그녀의 뜻을 이어받아 '착한 예수의 사제회'로
알려진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그녀는 63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다. |
이집트의 테베(Thebae,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 태생인 성 아스클라스는 아리우스파(Arianism) 총독 앞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정통교리를 용감하게 고백하여 살이 헤어질 때까지 매를
맞고 투옥되었다.
총독은 나일 강을 꼭 건너야 할 입장에 있었는데, 성 아스클라스는
총독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실히 인정하지 않으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총독 일행이 배를 저어 나가려 했으나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서 낭패를 겪고
있을 때, 성 아스클라스는 사람을 보내어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해야만 건널 수 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래서 그 총독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인의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말을 글로 쓰자마자 배가 움직여 반대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총독은 안티노에에서 성 아스클라스를 나일 강에 던져 죽이고
말았다. |
로마 순교록의 성녀 아녜스(Agnes, 1월 21일)의 수난기에 덧붙여진 추가 부분에
의하면,
성녀 에메렌티아나(또는 에메렌시아나)는 성녀 아녜스의 동갑내기 수양자매였다.
성녀 에메렌티아나는 성녀 아녜스의 순교 이틀 후에 돌을 맞고 순교하였다.
먼저 순교했던 성녀 아녜스의 묘를 찾아가 슬퍼하며 기도하는 도중에 이교도들의
돌에 맞아 무참히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성녀 아녜스의 묘지 위에 세워진 성당과 나란히 성녀 에메렌티아나의
무덤 위에도 성당이 하나 세워졌는데, 그것은 도시 외곽에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에메렌티아(Emerentia)로도 불린다.
귀족 가문 태생인 성 요한은 키프로스섬의 관리인 에피파니우스의 아들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아내와 자식을 두었으나 모두 사별하게 되자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수도 생활로 전향하였다.
그는 애덕을 타고난 듯하였다. 60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로 임명되자
그는 즉시 교구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돕거나 시리아에서 온 피난민을
구제하는데 나누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병원을 찾아 환자들을 간호하는 데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그는 자기 교구 내에 성직매매나 성직자들의 타락을 맹렬히 공격하여 바로
잡았지만 난처한 입장에 있는 이들에게는 지극히 관대하였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그리스도 단성설을 종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정통 교회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인의 침략으로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야 할 입장에 놓였을 때
니케타(Nicetas)와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가던 길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환시를 보고
고향으로 가서 운명하였다.
헨리쿠스 수소(Henricus Suso, 또는 헨리코 수소)는 유명한 도미니코 회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뛰어난 제자로, 독일 남서부 슈바벤의
콘스탄츠(Konstanz)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베르크(Berg)의 헨리쿠스 백작이고,
그의 어머니는 수소 가문의 성녀 같은 분이었다.
그래서 그의 실제 이름은 하인리히 폰 베르크(Heinrich von Berg)였으나,
어머니의 영향으로 수소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3세 때에 콘스탄츠의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여 신비 생활과 신적 사랑을
통해 강한 영적 변화를 체험하고는,
18세에 '영원한 지혜와 영적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콘스탄츠에서 공부를
마친 후 쾰른의 에크하르트의 학교에서 대학 공부를 하였다. 공부를 마치고
콘스탄츠로 돌아온 그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놀라운 현시를 보았으며,
예수 성명을 특히 공경하고, 천주의 모친께 남다른 신심을 지녔기 때문에
가끔 ‘신비가’란 소리를 들으며 생활하였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신심서적을 저술하였는데,
“영원한 지혜에 관한 소책자”(Das Buchlein der ewigen Weisheit)가 가장 유명하다.
이 책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작품으로 알려진
"준주성범"(Imitatio Christi)과 함께 여러 세기에 걸쳐서 인기를 누린
수소의 문학적, 신비학적 걸작이다.
그는 1348년 울름(Ulm)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가서 생활하다가 1366년 1월 25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31년 4월 16일 그의 '문화의 길'(viam cultus)을 높이 평가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학자들은 그를 "독일 신비가들 가운데, 아니 어쩌면 모든 신비 저술가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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