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월22일(금) 聖빈첸시오 순교자님..등

H-Simon 2010. 1. 21. 20:15

 

 
1월22일(금) 聖빈첸시오 순교자님..등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가우덴시오  Gaudentius 1월 22일 주교 노바라(Novara) +418년
2 도미니코 ** Dominic 1월 22일 수도원장 소라(Sora) +1031년
3 성녀 블레실라 Blesilla 1월 22일 과부 로마(Roma) +383년
4 빅토르 Victor 1월 22일 순교자   +305년
5 빈첸시오 ** Vincent 1월 22일 부제,순교자 사라고사(Zaragoza) +304년
6 빈첸시오 Vincent 1월 22일 순교자   +305년
7
     팔로티 **
Vincent Pallotti 1월 22일 신부,설립자   1795-1850년
8 아나스타시오** Anastasius 1월 22일 수도승,순교자 페르시아(Persia) +628년
9 오론시오 Orontius 1월 22일 순교자   +305년
10 복자 윌리엄 파텐슨 William Patenson 1월 22일 순교자   +1592년
총 10 성인

 
                  
 
 
 
 
 
   도미니코(1.22)
 
성인명 도미니코(Dominic)
축일 1월 2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활동지역 소라(Sora)
활동연도 +1031년
같은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이탈리아의 폴리뇨(Foligno)에서 태어난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어릴 시절 기록은 유실되었고, 그가 수도자가 된 후의 기록만이 다소 남아 있을
뿐이다.
성 도미니코는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된 후 주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예를 들어 소라, 스칸드릴리아, 상그로 그리고 다른 도시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세우는데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세운 각 수도원의 초대원장이 될 만큼 개척자의 정신이
뛰어났으며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는 새 수도원을 세우기 전까지는 주로 독수자처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일단 사업이 시작되면 불같이 뜨거운 열정으로 일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구령사업에도 남다른 능력을 보였는데, 때때로 이상한
기적을 행함으로써 수많은 죄인을 회개시키고 교회를 확장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의 소라에서 80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빈첸시오(1.22)
 
성인명 빈첸시오(Vincent)
축일 1월 2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부제, 순교자
활동지역 사라고사(Zaragoza)
활동연도 +304년
같은이름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의 사라고사의 성 빈첸시오(Vincentius, 좌)와
성 대 야고보(Jacobus, 중)와 성 에우스타키오(Eustachius, 우)

   성 빈첸시오(Vincentius)는 사라고사의 주교인 성 발레리우스
(Valerius, 1월 28일)의 제자로서 부제품을 받고 백성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는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던 중, 그 당시 에스파냐의 총독이었던
잔인한 박해자 다치아누스의 명에 의해 순교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303년경에 그리스도교 성직자를
 반대하는 두 번째, 세 번째 칙서를 반포했고, 연이어 평신도 박해 칙서를
내놓았다.
성 빈첸시오의 순교 전에 이미 사라고사에서는 18명의 순교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교인 성 발레리우스와 함께 순교할 결심을 단단히 한 후 온갖
고문을 받았다.
다치아누스는 산송장이 된 그의 육신을 황량한 들판에 던져 버림으로써
맹수와 독수리의 밥이 되게 하였다.
에스파냐 최초의 순교자로 현재 포르투갈의 수호성인인 성 빈첸시오의 상본은
종려가지를 쥐고 있는 부제 모습이나 철판 위에서 고문을 받는 모습으로 주로
묘사되어 있다.
 
 
 
 
 
 
  ▶빈첸시오 팔로티(1.22)
 
성인명 빈첸시오 팔로티(Vincent Pallotti)
축일 1월 2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795-1850년
같은이름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성 빈첸시오 팔로티(Vincentius Pallotti)는 1795년 4월 21일 로마(Roma)에서
식료품 장사를 하던 부유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스승이었던 돈 페리(Don Ferri)는 그를 “작은 성인이지만
머리는 조금 둔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학업 성취 능력은 향상되었고 1818년 5월 16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25일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그는 10년 동안 로마의
사피엔차(Sapienza)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친 뒤 영성 지도와 강론에만
전념하였다.

   보혈회를 설립한 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Gaspar del Bufalo, 1월 2일)와의
우정에서 고무된 성 빈첸시오는 자신의 직위를 포기하고 여러 본당에서
사목활동에 전념하였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사도적 역할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예견하듯이, 1835년 성 빈첸시오는 변화와 정의에 헌신하고자 하는
성직자, 수도자와 평신도들을 모아 가난한 소년들을 위한 야간학교와
직업학교를 세우고 선진 농업기술의 전수를 위한 학원을 세웠다.
학교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제화, 제단 기술과 농업 같은 시장성이 있는
기술을 가르쳤고 그들의 작업에 자부심을 주입시켰다.
그는 수도생활의 기도와 침묵에서만 성스러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필요한 부분을 찾아 채워주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일했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 1월 31일)와 비슷했다.

   1835년 그는 팔라티노회(천주교 사도회)를 설립했는데, 성 빈첸시오의
 일생 동안 12명의 회원만 있었지만 그 후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가톨릭 사도직 수녀회도 설립하였는데, 이 수녀회는 후에 팔로틴
선교 수녀회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이탈리아, 브라질,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지에 퍼져 창립자와 같은
이민자들을 돌보았으며, 동방 정교회 그리스도교인들과의 종교 간 대화를
촉진시키는 데 전문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젊은 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은 트라피스트 회원과
은수자들의 엄격함과 침묵에서 잘라져 나온 부분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거룩해 지십시오. 사회관계에서, 당신의 일터에서, 여가 생활 중에,
당신의 가르치는 직무에서, 출판사와의 만남과 죄인들과의 만남에서
거룩해 지십시오. 성스러움이란 단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
언제 어디에나 있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 빈첸시오의 사도적 활동은 자신의 엄격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1837년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사람들의 영적 목마름을 채워주기 위해 극도의 노력을 했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제는 누구나 쏴버리겠다고 위협하는 환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파로 변장하기도 했다.
1844년 성 빈첸시오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신부를 런던(London)에 사는
 이탈리아인들을 사목하도록 파견하였다.
그 후로 그의 수도회는 세계 각지로 뻗어나갔다. 로마의 시민들은
 성 빈첸시오 신부를 19세기에 나타난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
(Philippus Nerius, 5월 26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성 빈첸시오는 자신의 옷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반라의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성 빈첸시오 팔로티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다가
1850년 1월 22일 55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1950년 1월 20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 중이던 1963년 1월 20일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가톨릭 액션의 선구자'라고 불렀다.
 
 
 
 
 
 
 
 
   ▶아나스타시오(1.22)
 
성인명 아나스타시오(Anastasius)
축일 1월 2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승, 순교자
활동지역 페르시아(Persia)
활동연도 +628년
같은이름 아나스따시오, 아나스따시우스, 아나스타시우스

 

페르시아의 성 아나스타시오(Anastasius)


   그리스어로 된 성 아나스타시우스(또는 아나스타시오)의 자서전에 따르면
페르시아인인 이 젊은 군인의 본명은 마군닷(Magundat)이었고,
614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페르시아의 코스로에스 1세 군대 소속이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인 아나스타시우스로 개명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몇 년 후 그는 페르시아 유격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카이사레아(Caesarea)로 갈 허락을 받았다. 그는 여기서 체포되어 중노동에 처해졌다. 신앙을 포기하라는 수차례의 고문 중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결국 아나스타시우스는 다른 70여 명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목 졸려 죽임을 당했다.
처음에 그의 시신은 인근에 있던 성 세르기우스(Sergius) 수도원에 묻혔으나
후일 그의 유해는 로마(Roma)의 성 빈첸시오(Vincentius)와 성 아나스타시우스
성당에 안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