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7월20일 순교자 聖女이매임, 聖이광렬님등...8위 순교일

H-Simon 2009. 7. 18. 21:26

 

         

 

                하느님, 

               거룩한 순교자들의  삶을 통해서,

                주님 모습 닮아 가려는 저희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강복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리옵니다....아멘

 

              7월 20일 순교자님들.....

    聖女 李매임 데레사님,

       聖女 李영희 막달레나님,

       聖女 金로사님,

       聖女 金성임 마르타님,

       聖女 金장금 안나님,

       聖    李광렬 요한님,

       聖女 金루치아님,

       聖女 원귀임 마리아님.    

 

 

   *.(103위중에서).....7월 20일에 여덟분의 순교자가 계십니다.

                             8월에는 없고, 9월에는 33위님이 순교하셨습니다.

 

 

이매임 데레사님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20세에 과부가 되어 경기도 봉천(奉天)의 친정으로 돌아온 이매임님은
한 동네에 사는 여교우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한 뒤
조카 이정희와 영희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시었다.
이영희가 동정 생활을 결심하여 서울로 피신하자 함께 따라가 살며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4월 초 이매임님은 남명혁, 이광헌님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을
이겨 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에 감동하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마침내 4월 11일 자수하여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2세로 순교하셨다.

 

이영희 막달레나님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동정 순교자 이영희님은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의 권면으로 어머니 허계임,
언니 이정희님과 함께 어린 나이에 입교하시었다.
 
성장하면서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여 혼기에 이르자 혼담을 피해 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꾸미고 상경하여, 이매임과 함께 살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39년 김성임, 김 루치아, 어머니, 언니와 함께 자수한 뒤, 포청과 형조에서
일곱 번 형문(刑問)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아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교하시었다.

*참조* 고모 이매임 데레사님과 같은 날 순교하셨으며,

어머니 許계임 막달레나님(9월26일), 언니 李정희 바르바라님(9월 3일), 

생질녀 李바르바라님(5월 27일)은 모두 한 가족으로서 같은 기해 박해에 순교하심.

 
 
 
 
김 로사  로사님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과부가 된 뒤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 생활로 친정 식구들을 입교시킨 김 로사님은
1839년 1월 16일 권득인(權得仁) 님등과 함께 체포되시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신문을 받을 때 “하느님은 신인만물(神人萬物)의
큰 주인이시라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며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뒤
1839년 7월 20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6세에 순교하시었다. 
 
 
 
 
김성임 마르타님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인천 부평(富平)에서 태어난 김성임님은 혼인에 실패한 뒤 서울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점쟁이와 재혼하였다.
이 때부터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죽은 뒤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하던 김성임님은 1839년 4월 11일
자신이 몸붙이고 있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허계임, 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 루치아님 등과 순교를 결심한 뒤 이미 체포된 남명혁의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내고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0세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시었다.
 
 
 
김장금  안나님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김장금니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였고, 중년에 이르러 과부가 되자 노모와 함께 이광렬과 친하게 지냈다.
두 집은 사이가 좋고 화목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장금은 1839년 4월 이광렬, 이광헌 일가와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마침내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1세의 나이로 순교하시었다.
 
 
 
 
 
이광렬  요한님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경삼’으로도 불렸던 이광렬은 명문 양반인 광주 이씨의 후예로 태어나셨다.
22세쯤 형 이광헌과 함께 입교한 뒤 헌신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였으며,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유진길(劉進吉) 님등과 함께 북경을 왕래하며
나 베드로(모방) 신부, 정 야고보(샤스탕) 신부 등을 맞아들이셨다.
북경에서 세례성사를 받고 귀국한 뒤로는 육식을 끊고, 극기와 인내로
동정을 지키며 생활하시었다.
1839년 4월 7일 체포되어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 내고,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45세의 나이로 순교하시었다.

*기해 박해에 순교한 같은 가족분들....형 이광헌 아우구스티노님(5월24일),

        형수 권희 바르바라님(9얼3일), 조카 이 아가다님(다음 해-1월9일)

 
 
김 루치아 님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동정 순교자 김 루치아는 강원도 강촌(江村)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4세 때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고, 부모를 여읜 뒤로는 자신을 받아 주는
교우들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포졸들에게 자수한 뒤, 포청과 형조에서 천진한
태도와 한결 같은 신앙으로 모든 형벌과 고문과 유혹을 참아 내셨고,
교리에 대한 심문 중에도 기막힌 비유와 논리정연한 대답으로 형관을 감동시켰다.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2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원귀임 마리아님
 
관  련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7.20
 
 


동정 순교자 원귀임은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龍頭里)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다가 아홉 살 때 서울의
친척집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 때 동정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고 언제나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39년 3월 29일 원귀임이 있던 친척집이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자 재빨리
피신하였으나 길거리에서 원귀임을 아는 사람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당황했던 원귀임은 정신을 가다듬고
포청으로 끌려가셨다.
포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하는 형리에게
“내 영혼을 이미 하느님께 맡긴 지 오래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오직 죽을 뿐입니다." 하시며 배교를 거부하니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원귀임은 굴하지 않았고
드디어 7월 20일 일곱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22세에 순교하셨다

*참조*

신유박해 1801년 (순조) 


기해박해 1839년(헌종)       


병인박해 1866년(대원군)

        ..3大박해....약 30년 정도의 간격

 

 

 

 

 

 

  
 


카치니(Giulio C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