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5월24일 한국 순교자 8위의 순교일<1>..

H-Simon 2009. 5. 22. 16:23

 

이소사  아가타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5.24
 
 

이소사님 아가타님은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17세 때 결혼하였으나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살면서 어머니, 동생 이호영 베드로님과 함께 입교하였다.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사망하자 동생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였는데, 1835년 2월
(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동생 이호영 베드로니미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여인으로는 차마 견디기 힘든 형벌과 고문을 참아 냈고 형조로 이송되어
동생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옥살이를 더 해야 했다. 고통스러운 옥중 생활
속에서도 동생과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인내와
극기로써 생활하였다.
동생을 먼저 순교의 영광을 입게 하고 자신은 동생이 옥사한 지 7개월 후인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56세에 순교하시었다.
 

<동생 聖 이호영 베드로님>

 

   

박희순  루치아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5.24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박희순 루치아님은 뛰어난 미모와 재주 때문에 어려서
궁녀로 뽑혀 궁궐에 들어갔으나, 어린 순조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다.
30세경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하였으나 궁녀의 신분으로는 신앙 생활이 어려워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왔다. 그 뒤로 조카의 집에 살면서 언니 박 큰아기 마리아와
조카의 식구들을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자
박희순님은 조카의 가족들과 함께 전경협(全敬俠)-아가타님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4월 15일 전경협 아가타의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함께 체포된 많은 사람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나
박희순은 언니, 전경협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또한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열정적인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 낸 박희순은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어니 聖女 박큰아기 마리아님>

 

 

 

 

 

남명혁 다미아노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5.24
 

 

서울에서 태어난 남명혁 다미아노님은 젊어서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매우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30세경 입교한 뒤로 모든 세속의 나쁜 일과 손을 끊고 오직 신앙 생활에만 전념하시었다.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더욱 열심히 살아 이광헌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되어 예비신자를 모아 가르치고 병약자들을 방문하였으며
또 ‘성의회'(聖衣會)라는 신심 단체에 가입하여 신부를 도와 교회 일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초 한 예비신자의 밀고로 4월 7일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 때 그의 집에서 제의류(祭衣類), 경본(經本), 주교관(主敎冠) 등이
발견되어 포청과 형조의 관원들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했다.
그러나 남명혁은 모든 고통을 참아 냈고, 함께 체포된 아내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니 주님을 위하여 죽어서
광명한 곳에서 영원히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격려의 편지를 써 보낸 뒤
5월 24일 이광헌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시었다.
평소 ‘성의회의 치명자 남 다미아노’로 불리기를 바랐던 남명혁은 한창나이인

38세에 자신의 뜻대로 순교하시었다.


<부인- 聖女이연희 마리아님은 12세 아들의 고문을 지켜보고....참수되심>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관련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05.24
 
 

이광헌 아우구스티노님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여러 순교자를 낸 광주(廣州)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30세경 입교한 뒤로는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여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거듭되는 박해로 가산을 전부 잃고 순교할 때까지 10여 년을 궁핍하게 살면서도
회장직에 충실하고 또 냉담자를 권면하고 병약자를 위로하며 외교인에게 전교하였다. 그리고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와 신부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여 교우들을
미사에 참여하게 하고 강론을 듣게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어떤 예비신자가, 체포된 자기의 아내를 석방시키는 조건으로
이광헌을 포함한 53명의 교우 명단을 포졸에게 건네 주어 이광헌님은 4월 7일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형문(刑問)을 마친 후
4월 18일 형조로 이송된 그는 배교하면 가족들과 함께 석방시켜 주겠다는 형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 온 몸이 피범벅이 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냈다.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뒤 5월 24일
남명혁(南明赫)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에
순교하시었다.

<어니 聖女 박큰아기 마리아님>

 
 하느님,  순교자들의  살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려는 저희에게,

             사랑과 평화와 함께 강직한 덕으로 강복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리옵나아다....

아멘

 

 


카치니(Giulio C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