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한국인 세번째 사제

H-Simon 2011. 7. 4. 04:31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대축일 특집] 그늘에 가린 한국인 세번째 사제

 

 
; 한국교회의 세번째 사제는 누구일까? 뜻밖에도 특별히 교회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개의 신자들은 잘 모르는 내용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근대 한국 천주교회가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첫번째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의 그늘이 워낙 크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사의 뒤안길에 머물러 있었기에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도 마찬가지. 20여년전 뒤늦게 교회사 전면에 등장한 최 신부는 늦은 등장을 보상받으려는 듯 신자들의 사랑을 듬뿍받고 있다.

한국인 세번째 사제는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지 50년 만에 탄생했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을 맞아 김대건 최양업 신부의 뒤를 이어 고난과 역경을 헤치며 사제의 길을 걸어온 3명의 초기 한국 천주교회 사제들을 만나본다.

 한국인 사제 양성은 1831년 9월 조선교구가 설정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1835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선교사 모방(베드로) 신부는 이듬해 초부터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인재를 탐문 신학생으로 최양업(토마스)·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김대건(안드레아)을 선발 그해 12월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1837년 입국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라우렌시오) 주교 역시 정하상(바오로)·이문우(요한) 등 4명의 신학생을 선발해 직접 신학교육을 시켰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4년 중국 장춘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함께 받았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중국 상해에서 1845년 8월17일과 1849년 4월15일에 각각 사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도 채 못돼 순교했고 최양업 신부는 1849년 말 귀국 1861년 6월15일 선종할 때까지 10년 6개월간 전국을 누비며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을 했다.
 조선교회는 박해 와중에도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해 1855년 충북 제천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 를 세워 신학생들을 교육했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학교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선교회는 1882년부터 말레이반도 페낭 신학교로 신학생을 선발해 유학을 보내 사제 양성에 힘썼다.

 그 첫 결실이 1896년 4월26일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에서 뮈텔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은 강도영(마르코)·정규하(아우구스티노)·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사제품을 받았지만 나이 순에 따라 강도영(1863~1928) 신부가 세번째 정규하(1863~1943) 신부가 네번째 강성삼(1866~1903) 신부가 다섯번째 사제로 각각 기록된다.

 사제교육을 위한 이들의 여정은 험난했다. 서울을 출발 인천 부산을 거쳐 일본 나가사끼 홍콩 또다시 싱가포르를 지나서야 최종 목적지인 말레이 반도 페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페낭까지 무려 50여일이 걸린 유학출발 길이었다.

 페낭 유학 생활은 강성삼이 1882년에 정규하가 1883년 그리고 강도영은 제일 늦은 1883년에 시작했다. 이들을 비롯한 페낭의 조선 유학생들은 언어와 풍습 기후와 음식이 다른 땅에서 풍토병에 시달리는 등 갖은 고생을 다했다. 그러나 조선의 명예를 위해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분투해 2~3개월만에 라틴어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
 이들 조선 유학생들이 다른 풍토와 기후 그리고 음식등의 차이로 건강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국내에 신학교 설립을 준비하고 신학생들을 귀국시켰다.

블랑 주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 를 설립 1885년 10월 7명의 신학생으로 문을 열었다. 블랑 주교는 이듬해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 를 얻자마자 서울 인근에 신학교 부지를 물색 1887년 3월에 용산신학교 터(현 성심여고 자리)를 매입 부엉골 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했다.
 귀국한 페낭 유학생들은 용산신학교에서 수학 마침내 1896년 4월26일 강도영 정규하 강성삼 세 부제가 사제품을 받았다. 한국 땅에서 거행된 최초의 사제서품식이었다.

 한국인 세번째 사제인 강도영신부와 네번째 정규하 신부 다섯번째 강성삼 신부는 각각 경기도 안성 미리내본당과 강원도 횡성 풍수원본당 경남 밀양(당시 명례)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목활동을 했다.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에서 34년간 사목하면서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 묘소를 단장하고 그 옆에 기념 경당을 건립했으며 애국계몽운동 일환으로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양잠과 농업기술을 가르쳐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정규하 신부는 본당 부임과 함께 투전 에 빠져 있는 신자들을 바로잡는 일에 힘썼으며 지금의 풍수원 성당을 건립했다. 또 1920년부터 매년 6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에 성체거동 행사를 거행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울러 성당 사랑방에 삼위학당 을 세워 한글과 한문 수학 역사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삼위학당은 오늘날 광동초등학교로 발전했다.
 강성삼 신부는 밀양 본당에서 진양 양산 언양 등 14개 공소와 500여명의 교우를 대상으로 사목하던중 6년만에 37세로 요절했다. 페낭 신학생 시절 얻은 풍토병을 극복하지 못한 것.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당시 사제가 되기위해 걸어야했던 험란한 길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그와 함께 페낭 유학길에 올랐던 21명의 신학생 가운데 7명이 병사한 사실 역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한편 조선교회는 이후 용산예수성심신학교를 통해 1897년 여섯번째 이내수(아우구스티노)·일곱번 째 한기근(바오로)·여덟번째 김성학(알렉스) 신부 배출 한 것을 시작으로 1900년까지 12명의 사제를 배출했다.
 
[평화신문  2004.07.04]

오 나의 자비로운 주여.... 작곡: John Wimber ...편곡, 노래 : 테너 최성욱

첨부파일 오 나의 자비로운 주여 AR.mp3

 

 

 

 

 혈색순교, 백색순교와 녹색순교

 

 순교(殉敎)는 넓은 뜻으로는 주의, 사상을 위해서 죽는 경우를 말하며 주로 그리스도교나 이스람교와 같은 유일신교 세계에서 발생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톨릭 교회에서는 순교를 경신덕(敬神德)으로 여겨 특별히 중요 사항으로서 순교의 분명한 뜻을 부여하고 있으며, 돌로 쳐 죽임을 당한 성(聖) 스테파노가 첫 순교자로 일컬어 지고 있습니다. (사도7:54~60)

 우리나라 가톨릭 교도로서는 1785년(정조9)에 정약전 3형제 등과 함께 예배보다 발각된 김범우가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이듬해 죽음으로서 사실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등 크고 작은 박해를 받아 세계 종교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신앙선조들이 순교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인 신부이신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순조21)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 나셨습니다. 그의 가문은 몰락 양반가문으로서 증 조부인 김진우 때부터 탄생된지 얼마 안되는 천주교회에 입문하였습니다.

 그 후 1836년 부활절(4월 5일)을 전후하여 ’은이공소’를 방문한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 후보로 선발되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1836년 6월 7일 김대건은 먼저 선발되어 있던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위하여 파리 외방선교회 동양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세명 중 최방제는 교육을 받던 중 열병으로 죽고 1845년 김대건이 먼저 입국하였다가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건너가 8월 17일 페레올 주교로 부터 사제 품을 받았습니다. 다시 입국하여 사목활동을 하다가 1846년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 형으로 26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1925년 7월 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 품에 오르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 같이 "각종 고문이나 참수, 교수형, 화형, 돌로 쳐 죽이기와 맹수에게 물려 죽이기등 처형의 수단"에 의해 순교하신 것을 ’혈색순교(血色殉敎)’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이신 최양업(토마스)신부는 1821년 충청도 홍주의 누곡(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누동 새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순교자이며 성인인 최경환(프란치스코)와 역시 순교자인 이성래(마리아)입니다.

 1836년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가서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의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습니다.

 그 해 12월 3일에 귀국하여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로 부터 임지를 부여 받고 안성 ’배티성지’ 이웃의 동골에 거처를 정하고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5개 도의 산간 벽지에 흩어져 있는 4,000여명의 신자들과 100여개의 공소를 맡아 사목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후 12년 동안 사목활동을 하면서도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 교리서의 한글 번역과 천주가사의 저술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전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 오는 중 과로로 말미암아 문경에서 선종하셨습니다. 현재 배티 성지를 중심으로 많은 교우들이 하루 빨리 신부님께서 성인 품에 오를 수 있도록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가운데 신부님의 시복시성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 같이 박해시대에 피를 흘리는 순교는 하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언제라도 자기 피를 흘릴 혈색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복음전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백색순교(白色殉敎)’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세 번째 신부이신 정규하(아오스딩) 신부는 1863년 충남 아산군 신창면 남양리에서 정기화(마태오)와 한마르타의 3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1896년 4월 26일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를 졸업하고 뮈텔주교의 주례로 강도영(마르코), 강성삼(라우렌시오)과 함께 종현 성당(명동 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서품 후 강원도 횡성의 ’풍수원 성당’에 르메르 신부에 이어 제 2대 신부로 임명되어 1943년 10월 23일 81세의 나이로 선종할 때까지 47년간을 그곳에서 사목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천주고 신앙촌인 풍수원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서울,용인 등지에 살던 교우들이 박해의 칼날을 피해 숨어들어 정착한 곳입니다.

 그 후 무려 80여년 동안을 목자없이 평신도들로만 신앙 공동체를 일운채 믿음을 지켜오다가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1888년 풍수원 본당이 정식으로 설립되고 정규하 신부가 1896년 제 2대 주임으로 부임한 것입니다.

 정규하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현재의 성당을 착공하여 1907년에 준공되고 2년 뒤인 1909년에 낙성식을 거행했습니다. 풍수원 성당은 서울 약현 성당과 비슷한 크기의 연와조 건물로 우리나라 네 번째의 성당 건물입니다.

 정규하 신부는 이곳을 거점으로 사목활동을 한 결과 풍수원 성당의 교세는 크게 확장 되었고 그곳으로부터 원주, 춘천, 양평, 횡성, 평창, 홍천 본당 등이 분당되었습니다.

 정규하 신부님과 같이 박해시대는 지나갔지만 "넓은 대지에 깊게 뿌리 내리고 우뚝선 상록수(常綠樹)" 처럼 천수(天壽)를 다하여 신앙을 증거하고 자기를 봉헌하는 것을 ’녹색순교(綠色殉敎)’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백성을 사랑하시어 오묘하시게도 세계 교회사에서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드리게 하셨고, 첫 번째 신부님이신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 두 번째 신부님이신 최양업(토마스) 신부님, 세 번째 신부님이신 정규하(아오스딩) 신부님께  차례로 ’혈색순교’, ’ 백색순교’, ’녹색순교’ 모범을 보이게 하셨습나다.

 우리 천주 교우들은 세 분 신부님과 다른 여러 신앙선조들의 순교정신을 이어받아 "오늘의 순교는 땀과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체험하는 것이다."라는 각오로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다 바쳐 ’나눔의 순교’, '봉사의 순교’, ’사랑의 순교’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