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3월 6일 聖女콜레타, 聖女아네스님..

H-Simon 2011. 3. 5. 23:36

 

 

 3월 6일(일)

聖女콜레타, 聖女아네스님..

 

  

성녀 콜레타(Coleta)
 
 

 

 

 

 

   ▶콜레타(3.6)
 
성인명 콜레타(Coleta)
축일 3월 6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수녀
활동지역  
활동연도 1381-1447년
같은이름 꼴레따, 꼴레뜨, 콜레따, 콜레트

 

성녀 콜레타(Coleta)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ie)의 코르비(Corbie)에 사는 목수의 딸인
성녀 콜레타는 1381년 1월 13일에 태어나 니콜레트(Nicolett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흔히 콜레트(Colette)로 불렀다.
17세 때 천애의 고아가 된 그녀는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었으며,
코르비에서 독수자로 생활하였다.

   21세 때부터 성녀 콜레타는 코르비의 원장이 빌려 준 은둔소에서
홀로 살았는데,
그곳에서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
환시를 보았다.
이때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부인회'(클라라 수녀회)
엄격하던 그들의 원 회칙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이미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가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클라라 수녀회의 개혁을 지시하는 환시에 응답하려고
자신의 은둔소를 떠나,
영적 지도자인 앙리 드 바움(Henry de Baume) 신부의 권고에 따라
교황청 책임자인 베드로 드 루나(Petrus de Luna)를 면담하기 위하여
1406년에 니스(Nice)로 갔다.
베드로 드 루나 역시 깊은 감명을 받고,
그녀가 클라라 수녀회에 입회하는 것을 허락하고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원 설립을 위임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피카르디와 사부아(Savoie)의 수녀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으나,
1410년부터 앙리 드 바움 신부의 지지를 얻어서
개혁 사업은 점차 성공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 지역 내에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수도원을 17개나 세웠고,
르 퓌 앙 블레(Le Puy en Velay)의 한 곳을 포함하여
기존의 다른 수도원을 개혁하였다.
 
성녀 콜레타는 무슨 일을 수행하도록 훈련받거나 준비한 일은 없었지만,
믿음의 힘과 성덕
그리고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결정에 따라 일을 올바르게 성취하였다.
 
그녀는 자주 탈혼에 빠졌고 고난에 대한 환시를 보았으며,
벨기에의 겐트(Gent) 수도원에서 자신이 죽으리라는 예언을 하였다.
성녀 콜레타의 개혁 클라라 수녀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녀는 1740년 1월 23일 시복되었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아녜스(3.6)
 
성인명 아녜스(Agnes)
축일 3월 6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공주, 수녀
활동지역 보헤미아(Bohemia)
활동연도 1211-1282년
같은이름 아그네스, 아네스

 

Agnese di Boemia (1211-1282) 

   성녀 클라라(Clara, 8월 11일)
보헤미아 혹은 프라하(Prague)의 성녀 아녜스로 불리는 그녀를
 '나의 반쪽'이라고 불렀다.
 
성녀 아녜스는 성 벤체슬라우스(Wenceslaus, 9월 28일)의 후손으로
부친의 이름은 1197년에 보헤미아의 왕좌에 오른 오토카르 1세(Ottokar I)이다.
또 헝가리의 성녀 엘레사벳(Elisabeth, 11월 17일)과는 사촌간이다.
성녀 아녜스는 불과 세살 때에 슐레지엔(Schlesien, 실레지아)의 공작인
하인리히의 아들인 볼레슬라우스(Boleslaus)와 약혼하고,
약혼자의 어머니가 세운 수도원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6세 때에 약혼자가 죽음으로써 보헤미아로 돌아왔고,
9세 때에는 프레데릭 황제의 아들인 하인리히와 약혼하여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로 가서 독일어와 그곳의 풍습을 익혀야 했다.

   그러나 성녀 아녜스는 늘 하느님께 굳은 신앙을 표현하고자 애썼으며,
자기 혼자서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며 덕을 닦았다.
그녀는 차츰 나이가 들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동정생활을 갈구하면서 일이 꼭 그렇게 되도록 기도한 결과,
또다시 파혼이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다시 잉글랜드(England)의 헨리 3세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그녀는 더욱 열렬히 기도하고 고행하며 화려한
궁중 의상 밑에 고행복을 입고 지냈다.
그녀는 새벽 일찍 일어나 맨발로 성당을 다녀오기가 일쑤였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28세의 미모의 여성이 되었다.
온갖 청혼을 물리친 그녀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그 결과 결혼에서 자유롭게 된 그녀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마침내 1236년에 클라라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 정신의 올바른 계승자로 살았다.
비록 공주 출신이었지만 수녀원의 하찮은 일까지 자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놀라운 성덕을 쌓다가 77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그녀는 187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1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