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월2일 聖그레고리오, 聖바실리오님..등

H-Simon 2011. 1. 1. 14:16

 

 

12일(일)

聖그레고리오, 聖바실리오님..등

 

 

도메니키노의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오(Gregorius)


 

                                       

   

 
 
 
 
 
 
     ▶그레고리오(1.2)
 
성인명 그레고리오(Gregory)
축일 1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교회학자, 교부
활동지역 나지안주스(Nazianzus)
활동연도 329/330-389/390년
같은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Athanasius)와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오(Gregorius)

   나지안주스의 주교로 45년간 봉직했던 성 그레고리우스(1월 1일)
성녀 논나(Nonna, 8월 5일)의 아들로 태어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그레고리오)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나지안주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공부하던 중에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를 만났고,
그 후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 수사학교를 다녔으며,
아테네(Athenae)에서도 10여 년을 성 바실리우스(Basilius)
미래의 황제 율리아누스 배교자와 함께 공부하였다.
30세 때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즉시 바실리우스와 함께
이리스 강변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 2년 후부터 부친을 돕던 중,
362년에 사제로 서품되고, 372년경에는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받았다.

   이 교구는 아리우스(Arius) 지역이었으므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교로 축성은 되었으나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발렌스 황제가 죽고 정통교회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게 될 때,
일단의 주교들이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초청하여 아리우스파(Arianism) 지역에서
정통교회의 활성화를 도모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아나스타시아(Anastasia)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여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이때 그는 아리우스파인 막시무스(Maximus)와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고,
388년에는 새로 입교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의 가르침을
정통교리로 인정하고 아리우스파 지도자를 축출하는 칙서를 발표케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의 임명은 굉장한 파문을 일으켜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Council of Constantinople)까지 열려 문제가 심상치 않게 발전하므로,
그는 교회 내의 평화를 위하여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다가 고향 땅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정통교회의 수호에 큰 공적을 남겼고,
또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의 선언문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교회학자’로 불린다.
 
 
 
 
   ▶바실리오(대)(1.2)
 
성인명 바실리오(대)(Basil the Great)
축일 1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교회학자, 교부
활동지역
활동연도 329-379년
같은이름 바실리우스

 

성 바실리오(Basilus)와 성 그레고리오(Gregorius)와 성 치릴로(Cyrillus)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  바실리오)는 부유하고 이름 있는 그리스도교 집안
출신으로, 교회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문 중의 하나이다.
그의 할머니는 마크리나(Macrina, 1월 14일),
그의 부친은 바실리우스(5월 30일),
그의 모친은 엠멜리아(Emmelia, 5월 30일),
그의 큰 누이는 마크리나(7월 19일),
그리고 두 동생은 니사(Nyssa)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
세바스테(Sebaste)의 베드로(Petrus, 1월 9일)인데,
모두가 성인품에 오른 분들이다.

   그는 카이사레아(Caesarea),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그리고 아테네(Athenae)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이곳에서 나지안주스(Nazianzus)의 그레고리우스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357년경에 그는 동방의 주요 수도원들을 방문하였으며,
35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네오카이사레아(Neocaesarea)의 이리스(Iris) 강변의 안네시에서
은수자로 정착하였다.
바실리우스는 불과 5년 동안을 그의 공동체와 생활했을 뿐인데도
동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와는 달리 법 제정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은 정교회 수도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주요한 원리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사제로 서품된 후 성 바실리우스는 365년부터 카이사레아 교구를 위하여
일했고, 370년에는 그곳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또 아리우스파(Arianism) 황제인 발렌스(Valens)
정통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용감히 맞서 싸웠다.
이 때문에 그는 지방 총독 앞에 끌려가서 자신을 변명하여야 했다.
바실리우스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였기 때문에 총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당신 같은 주교는 일찍이 본적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를 보더라도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의 강직성 때문에 교황 성 다마수스(Damasus)
서방 교회간의 관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요양원을 짓거나 혹은 대대적으로 진료사업을 펼쳤으며
설교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방 정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발렌스 황제가 전투에서 사망한 지 불과 한 달 만인
1월 1일 카이사레아에서 사망하였다.

   바실리우스는 초대 교회의 큰 거인이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아리우스파를 몰아낸 것이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배경에는
바실리우스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가 네오카이사레아에서 제정한 규칙과 조직이 동방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온다.
또한 바실리우스는 성직매매를 완강히 거절하였으며,
가뭄과 한발의 희생자를 대대적으로 원조하였으며,
보다 훌륭한 성직자 양성을 도모하였고, 엄격한 성직자 법규를 주장하고,
과감하게 악습을 끊어버리면서,
카파도키아(Cappadocia)에서 만연된 매춘행위 관계자들을 파문하였다.

   그는 유식하고 정치력도 있는 사람이면서 성덕이 뛰어났으며,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의 해박한 저서들과 4백여 통의 편지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령에 관한 저서와 에우노미우스를 반박하는 세 권의 저서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와 함께 편집한 “필로칼리아”가 그 중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교회학자이며 동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큰 공경을 받는다.
 
 
 
 
   ▶가스파르 델 부팔로(1.2)
 
성인명 가스파르 델 부팔로(Gaspar del Bufalo)
축일 1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786-1837년
같은이름 가스발, 가스팔

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Gaspar del Bufalo)


   이탈리아 로마(Roma) 태생인 성 가스파르는 요리사의 아들이었으나,
콜레지오 로마노에서 교육받고 1808년에 서품되었다.
그는 교황 비오 8세(Pius VIII)의 추방 이후
나폴레옹 보나팔트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했기 때문에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5년 동안 코르시카(Corsica)로 유배당하였다.

   그가 귀향할 때에는 훌륭한 선교사가 되었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교회를 설립하여
1815년에 교황 비오 7세로부터 보혈선교회로 공식 승인을 받았다.
성 가스파르는
스폴레토(Spoleto) 부근 지아노(Giano)와 알바노(Albano)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나폴레옹의 통치 기간이었기에 이런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의 선교회는 날로 발전하였다.
그는 또 자선사업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임하였으며,
세상의 복음화가 자기 선교사들의 목표임을 늘 주지시켰다.
그는 알바노에서 콜레라에 희생되어 운명하였다.
그는 1904년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54년 6월 1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세라핌(1.2)
 
성인명 세라핌(Seraphim)
축일 1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승, 은수자, 신비가
활동지역 사로프(Sarov)
활동연도 1759-1833년
같은이름 쎄라핌

 

사로프의 성 세라핌(Seraphim)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인 성 세라핌은
1759년 7월 19일 러시아 쿠르스크(Kursk)의 동방교회 가문에서
프로코르 이시도레빅 모쉬닌(Prokhor Isidorevic Moshnin)이란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건축업자인 아버지 이시도레빅 모쉬닌이 일찍 사망하자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완성하지 못한 교회 건축을 도맡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 번 기적적인 사건을 체험한 그는
상인이 된 형을 돕던 중 마음속으로 수도생활로의 부르심을 깨달아
1776년 동료들과 함께 키예프(Kiev) 순례를 떠났다.
수도생활에 대한 확신을 가진 그는 1778년 19세의 나이로
사로프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 후 1786년에 서원을 하고 히브리어로 ‘열정’이라는 뜻의
세라핌이라는 수도명을 받았으며, 1793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듬해 그는 사로프에서 몇 마일 떨어진 숲에서 은둔생활을 하기 위하여
수도원을 떠났는데, 자신의 수도원을 비롯하여 많은 수도원으로부터
원장직을 의뢰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04년에는 세 명의 강도들에게 심한 매를 맞아 곧 수도원에 옮겨졌으나
성모 마리아에 의해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숲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그 뒤 그는 절대적인 침묵과 고요 속에서 전세계의 회개를 위한 기도를 하며
생활하였다.
당시는 나폴레옹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1810년 질병과 수도원장직을 수행해야 할 의무 때문에 사로프의 수도원으로
되돌아왔지만 그는 수 년 동안 격리된 작은 방에서 완전한 은둔생활을 하였다.
1815년에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한 후부터는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방문자들에게 영적 상담을 해주었다.
그리고 66세 되던 1825년 숲속의 은둔소로 되돌아가 영적 사부 혹은
영성 지도자로서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었다.

   1832년부터 죽음이 가까워짐을 깨달은 성 세라핌은 영원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묘 자리를 미리 정해 놓고 자신의 방 입구에 놓인 관 앞에서 묵상에 잠겨 있다가 종종 졸도하기도 하였으며, 이때 많은 기적적인 행적을 남겼다고 한다. 이듬해 1월 2일 그는 수도원에 있는 그의 방에서 성화 ‘우리의 부드러운 성모 마리아’를 바라보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숨진 채 발견되었는데, 그의 옷은 그의 손에서 떨어진 촛불에 불타 버린 상태였다.

   성 세라핌이 사망한 후 그의 무덤을 참배하던 사람들에게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1903년 1월 29일 러시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선포하는 교령을 반포한데 이어 그 해 7월 19일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아벨(1.2)
 
성인명 아벨(Abel)
축일 1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구약인물
활동지역
활동연도 +연대미상
같은이름  

 

카인(Cain)과 아벨(Abel)


   아담과 하와의 둘째 아들(창세 4,2)
밭을 가는 농부인 형 카인(Cain)과는 달리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다.
아담의 가족은 하느님께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이때 우발적인 사건으로 아벨은 형 카인에게 죽임을 당하여
인류 최초로 살해당한 인물이 되었다.
기르던 양떼 가운데에서 맏배를 잡아 기름기를 봉헌한 아벨의 예물은
하느님께 받아들여졌으나 카인이 드린 곡식 예물은 반기시지 않자,
시기심에 사로잡힌 카인이 동생 아벨을 들로 나가자고 꼬여
죽였던 것이다(창세 4,3-8).

   창세기에서는 아벨에 대하여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았지만,
복음서에서는 아벨은 무죄하다고 평가되었다(마태 23,35; 루가 11,51).
복음서는 아벨의 죽음을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 원인이 되어 빚어진
예언자 내지 순교자의 죽음과 유사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산 첫 번째 인물로 ‘아벨’을 꼽았다(히브 11,4).
 
아벨의 예물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것은
믿음으로 형 카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풀이함으로써
아벨을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살해된 인물로 평가하였다.
 
 
 
 
   ▶제라르도 코뇰리(1.2)
 
성인명 제라르도 코뇰리(Gerard Cognoli)
축일 1월 2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수사
활동지역
활동연도 +1345년
같은이름 게라르도, 게라르두스, 제라드, 제라르두스, 제라르드

 

복자 제라르도 코뇰리(Gerardus Cognoli)


   게라르두스 코뇰리(Gerardus Cognoli, 제라르도)
이탈리아 북부에서 어느 귀족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10살 때에 부친을 여의였고 그 얼마 후에는 모친마저 잃었다.
친척들은 결혼하기를 강요하였으나
그는 모든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40세 때까지 순례와 은수자의 생활을 하였다.
그는 황량한 시칠리아(Sicilia) 섬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그는 프랑스 앙주(Anjou)
성 루도비쿠스(Ludovicus, 8월 19일)의 성덕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평수사로서 놀라운 단순 덕과 겸손을 보였다.
가끔씩 부엌일을 하던 중에 기도에 몰두하여 물의를 일으킨 때도 있었다.
한 마디로 그의 성덕은 아주 높은 단계였다.
그의 식사는 빵과 물이 전부였고 널빤지 위에서 잠을 잤다.
그는 너무나 자주 탈혼에 빠졌는데 그 때에는
그의 주변에 광채가 빛났다고 한다.
그에 대한 공경은 1908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