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2월1일 니코메디아의 聖女 나탈리아 님..등

H-Simon 2010. 11. 30. 12:02

 

 

12월1일(수)

니코메디아의 聖女 나탈리아 님..등

 

                                 니코메디아의 성녀 나탈리아(Natalia)  

 

  

 

 

 

 

 

 

    ▶나탈리아(12.1)
 
성인명 나탈리아(Natalia)
축일 12월 1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과부, 순교자
활동지역 니코메디아(Nicomedia)
활동연도 +304년경
같은이름 나딸리아

 

니코메디아의 성 하드리아노(Hadrianus)와 성녀 나탈리아(Natalia)


   소아시아 니코메디아의 궁중 관리였던
성 하드리아누스(Hadrianus, 9월 8일)는 일단의 신자 무리들의 인내심과
열렬한 믿음에 감동하여,
비록 자신이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는 즉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그의 아내인 성녀 나탈리아는 옥중의 남편을 찾아다니며
신앙심을 일깨워 주었다.
그가 사형 언도를 받고 방문객의 면담이 금지되자,
아내는 소년 복장으로 위장하고 관리들을 매수하여 남편의 온갖 고통을
위로하고 신심을 굳게 해 주었다.
그가 죽는 현장에 아내도 참석하여 처절한 죽음을 목격하였다.
 
그의 축일은 순교한 날인 3월 4일에 지내기도 하나,
로마 전례에서는 그의 유해가 로마(Roma)로 이장된 9월 8일을
그의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한편 성녀 나탈리아는 자신과 강제로 결혼하려는 니코메디아의
어느 궁중 관리의 손아귀를 벗어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피신하여 여생을 지냈다.
성 하드리아누스는 군인들과 푸주한의 수호성인이다.

 

 

 

 

 

   ▶에드문도 캠피언(12.1)
 
성인명 에드문도 캠피언(Edmund Campion)
축일 12월 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영국(UK)
활동연도 +16세기경
같은이름 에드먼드, 에드몬드, 에드문두스, 에드문드, 켐피온

 

영국의 성 에드문도 캠피언(Edmundus Campion)

   런던의 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난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Edmundus Campion, 에드문도)는 가톨릭 신자로 성장하여, 불과 15세의 나이에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 세인트 존스 대학을 다녔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그 당시의 석학이던 레스터(Leicester)의 얼(Earl),
로버트 세실(Robert Cecil), 심지어는 엘리자베스(Elizabeth) 여왕까지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영국 교회의 으뜸으로 인정하는 수장령에 맹세하고, 1564년에 영국 교회의 부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증대되는 사실에 의혹을 품고,
1569년에 아일랜드로 건너가서 공부한 후에 자신의 오류를 깨닫고
가톨릭으로 되돌아 왔다.

   교황 비오 5세(Pius V)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단죄함으로써
영국 내의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시작될 때,
그는 프랑스의 두에(Douai)로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예수회원이 되어 보헤미아(Bohemia)의 브르노(Brno)로 갔다.
그는 프라하(Prague)에서 대학 강단에 섰으며, 1578년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와 로버트 퍼슨(Robert Persons) 신부가 영국 선교사로 가는
첫 번째 예수회원이 되어 1580년 영국으로 떠났다.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그의 활동, 옥스퍼드의 대학 성당에서 행한 그의 연설
 ‘데쳄 라시오네스’(Decem Rationes), 그리고 유명한 브라그(Brag)의 간행은
그로 하여금 영국사에 한 획을 긋게 하였다.
 
그는 옥스퍼드 근교 리포드(Lyford)에서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었고,
자신의 변호를 거부한 채 심한 고문을 받다가 타이번(Tyburn)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그는 진정한 사제였으며,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England)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