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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
골룸바노(Columban) |
축일 |
11월 23일 |
성인구분 |
성인 |
신분 |
설립자, 수도원장, 선교사 |
활동지역 |
보비오(Bobbio) |
활동연도 |
540-615년 |
같은이름 |
골롬바노, 골롬바누스, 골롬반, 골룸바누스, 골룸반, 콜롬바노, 콜롬반, 콜룸바노, 콜룸바누스, 콜룸반 | |
보비오의 성 골룸바노(Columbanus) |
아일랜드의 웨스트 렌스터(West Leinster) 태생인
성 콜룸바누스(Columbanus, 골룸바노)는 그의 모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아주 어렸다고 한다.
그는 얼마동안 신넬(Sinnel)이란 수도자와 함께 언(Erne) 호수의 수백 개의
섬 중의 하나인 클루아인(Cluain) 섬에서 살다가 뱅거(Bangor)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12명의 다른 수도자와 함께 프랑스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고(590년경), 이 선교활동이 성공적이었으므로 뤽세이유(Luxeuil)와
퐁텐(Fontaine) 지방도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추종자들이 유럽 전역을 선교하면서,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 수도원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반대를 받았는데, 특히 프랑크계의 주교들로부터
극심한 반대를 받았다.
그는 성좌에 서한을 보내어 실정을 보고하는 한편,
603년에 샬롱(Chalon)에서 개최된 갈리아(Gallia) 시노드에 불참하면서 항의하였다. 또한 610년에는 부르고뉴(Bourgogne)의 국왕 테오도리쿠스 2세의 결혼을
반대함으로써 이 지역의 모든 아일랜드 수도자가
추방당하는 곤경을 겪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롬바르디아(Lombardia)의 아리우스계 왕인 아지올드의 영접을 받고
이탈리아 선교에 착수하였다.
그는 보비오, 밀라노(Milano), 제노바(Genova) 등지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들 수도원들은 그 당시에 학문과 문화 그리고 영성의 중심지로서
큰 기여를 하였다.
성 콜룸바누스는 자신의 수도회 규칙, 강론집, 시 그리고
아리우스(Arius) 이단 반박문 등 수많은 글을 남겼다.
그는 615년 11월 23일 자신이 발견해서 성모님께 봉헌한 보비오 수도원 부근의 한 동굴에서 생활하다가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보비오에 있는 성 콜룸바누스 성당의 지하에 모셔져 있다. |
사보이아의 복녀 마르가리타(Margarita) |
사보이아 공국의 아마데우스(Amadeus) 왕과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마르가리타(Margarita)는 두 자녀를 둔 홀아비인
테오도레(Theodore)란 사람과 결혼하였다.
그녀 자신에게는 자식이 없었지만 남편을 극진히 섬겼을 뿐만 아니라,
제노바(Genova)에 기근과 전염병이 극성을 부릴 때에는 자신을 온전히
잊어가면서 주민들을 간호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그러던 중 1418년에 남편과 사별한 후 그녀는
성 빈첸시오 페레리우스(Vincentius Ferrerius, 4월 5일)의 도움을 받아가며
기도생활에만 몰두하면서 25년을 살았다.
또한 그녀는 주님의 환시를 보는 도중에 질병과 중상 그리고 박해의
세 글자가 적힌 화살 세 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모두 그녀가 받을 고통을 의미했다고 한다.
결국 이것이 사실로 나타났는데,
그녀는 위선자라는 고발과 동시에 중병에 걸렸으며
또 발도파 이단이라는 누명을 썼다.
그녀는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운명하였다.
그녀는 1669년 교황 클레멘스 9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
이코니움의 성 암필로키오(Amphilochius) |
성 암필로키우스(암필로키오)는 카파도키아(Cappadocia) 출신으로
돈을 벌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수사학 교사로 생활하였다.
그 후 나지안주스(Nazianzus)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연만한 부친을 봉양하며 가난하게 살았는데,
이때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가 이 친구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제공하였다.
374년 35세가 된 성 암필로키우스는 현재 터키의 코니아(Konya)인
이코니움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마지못해 이 직책을 받아 들였지만,
그의 부친은 그레고리우스에게 아들을 빼앗아갔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역시 그의 친구이던 성 바실리우스(Basilius) 역시 그를 여러 면에서 도왔다.
그는 주교로 착좌하자마자 즉시 그의 뛰어난 화술로 설교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고, 교리와 규율상의 어려운 문제들은
늘 바실리우스와 대화하면서 풀어나갔다.
그는 이코니움 회의를 개최하여 마케도니아 이단을 단죄했는데,
이 이단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던 사람들이었다.
또 그는 황제를 설득시켜 아리우스(Arius) 이단을 금하는 칙령을 반포케 하였다.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우스는 성 암필로키우스를 일컬어
나무랄 데 없는 주교, 천사 그리고 진리의 사자라고 격찬하였다. |
교황 성 클레멘스 1세(Clemens I)의 순교 |
성 클레멘스(Clemens)는 로마인이었고 로마(Roma)에서 순교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황제의 집사 친구로서 성 베드로(Petrus)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는 91년경에 교황 성 아나클레투스(Anacletus)를 승계하여
제4대 교황이 되었으나,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에 의하여 크림(Krym) 반도로
귀양을 갔고, 그곳의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 죄수들에게 열렬히 설교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나 그로 인해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목에 닻을 달고 바다 속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그가 이교를 반박하기 위하여 고린토인들에게 쓴 편지(The Epistle of Clemens)의
저자임을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편지는 신약성서 다음으로 오래된 초대교회의 유명한 문서 가운데 하나로서 최초의 교부 문헌으로 인정받는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며,
로마의 주교가 지니는 권위를 확인해 주는 중요한 문서이다. |
로마의 성녀 펠리치타(Felicitas)와 성 실바노(Silvanus) |
성녀 펠리치타(Felicitas)는 귀족으로 세례를 받은 부인인데
남편과 사별한 뒤로는 과부로서 하느님을 섬기고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으며,
자선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은 열심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래서 이 열심한 부인 때문에 귀족 집안이던 그녀의 집안에 있던 우상들이
모두 제거되었는데, 이것을 보고 이교도의 사제들이 그녀를 고발하였다.
그래서 그녀와 그녀의 자녀 일곱 명이 황제 앞으로 끌려가서
이교도의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도록 강요당했다.
이때 그녀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위협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영이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이에 심문관이 그럼 죄 없는 자녀들마저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그녀는
“만일 그들이 신자라면 영원히 살도록 힘쓸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불을 기다려야 할 뿐입니다”고 대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리하여 황제는 그들을 각기 다른 형벌로 죽임으로써
모두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되었다.
보통 7형제(the Seven Brothers)로 불리며,
성녀 펠리치타의 자녀로도 주장되는 순교자들은
성 알렉산데르(Alexander),
성 비탈리스(Vitalis),
성 마르티알리스(Martialis),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성 펠릭스(Felix),
성 필리푸스(Philippus) 그
리고 성 실바누스(Silvanus)로 알려져 있다.
7형제의 축일은 모두 7월 10일에 기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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