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9월17일 聖女힐데가르데, 聖로베르토님..등

H-Simon 2010. 9. 16. 20:59

 

 
9월17일(금)
聖女힐데가르데, 聖로베르토님..등 

     

          
 
 

빙엔의 성녀 힐데가르데(Hildegardis)

16.jpg
                                                      
 
 
 
 
 
 
   ▶힐데가르데(9.17)
 
성인명 힐데가르데(Hildegard)
축일 9월 17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수녀원장, 신비가, 저술가
활동지역 빙엔(Bingen)
활동연도 1098-1179년
같은이름 힐데가르다, 힐데가르드, 힐데가르디스, 힐데가르타, 힐데가르트

 

 


   독일 남서부 알자이 부근 작은 마을인 베르미스하임에서
귀족인 아버지 힐데베르트의 10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성녀 힐데가르데는 어릴 때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8세 때 병약한 관계로 디지보덴베르크에 있는 베네딕토 수녀회에 맡겨져,
스판하임의 메긴하르트 백작의 동생인 유명한 은수자 유타의 보호하에
읽기와 쓰기, 찬미가 부르기, 수작업과 음악 등의 교육을 받았다.
성녀 힐데가르데는 12세 때부터 은수생활을 시작하였고,
14세 때에 수도 서약을 하였다.

   1136년 유타가 세상을 떠나자 38세의 힐데가르데가 수녀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1141년 그녀의 마흔 세 번째 생일날,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면서
예언자적 소명을 받았다.
그녀는 처음에 이 체험을 거부하여 내적인 갈등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이며 고해 신부에게 상담을 하였고,
마인츠 교구 대주교의 지시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그녀가 체험한 환시가
사실임을 확인한 후 그녀의 환시를 글로 기록하는 일을  돕도록
수도승인 폴마르를 임명하였다.
특히 성녀가 살던 시대는 서방 교회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그녀의 예언자적 소명이 더욱 큰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1148년 그녀는 빙엔의 루페르츠베르크에 새로운 수녀원을 설립하고,
1150년 다른 수녀들을 데리고 디지보텐베르크 수도원을 떠나
그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에 첫 번째 저서인 "쉬비아스"(Scivias Domini)를 완성하자
그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연과 치료에 관한 책,
"책임 있는 인간", "세계와 인간" 등을 저술하였고,
1165년에는 라인 강 건너편 아이빙엔에 두 번째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환시를 설명하기 위해 독일 전역을
네 차례나 도는 설교 여행을 하였다.
그녀는 1179년 9월 17일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루페르츠베르크 수녀원에 묻혔다.

   성녀 힐데가르데는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여성으로 손꼽히며,
다양한 방면의 연구를 통한 그녀의 저서는 단테나 윌리엄 블레이크에
견줄만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공식적으로 시성된 사실은 없다.
그러나 1664년부터 독일 마인츠 교구의 시간 전례서와 미사 경본에
9월 17일을 그녀의 축일로 기념하기 시작하였으며,
1940년부터 이 축일을 교황청에서도 받아들였다.
그녀는 비록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로마 순교록"에도 성녀로 수록되어 있다.
 
 
 
 
 
 
 

   ▶로베르토 벨라르미노(9.17)
 
성인명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 Bellarmine)
축일 9월 1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추기경, 교회학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542-1621년
같은이름 로버트, 로베르또, 로베르뚜스,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노, 벨라르미누스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         


   성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노는 1542년 10월 4일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의 몬테풀차노에서 태어나 1560년 10월 예수회에 입회하여
1570년 3월 25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당시 교회는 종교 개혁자들에 대항하느라 교부학과 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경시되던 상태였다.
토스카나 지역의 유망한 젊은 학자로서 그는 종교 개혁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교리를 체계화하고 성서를 연구하는 두 가지 일에
그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루뱅에서 예수회 회원으로는 처음으로 교수가 된 사람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그의 강의록을 바탕으로 세 권으로 된
“이단 반박론”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교황의 세속권과 평신도의 역할에 관한 부분들이다.
그는 ‘왕권신수설은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분노를 초래했으며, 또한 로마 교황의 세속권을 발전시켰다.
비록 그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인 버클레이와 대항하여교황을 옹호했지만,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벨라르미노는 1599년 ‘학식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교황 클레멘스 8세에 의해 추기경이 되었다.
벨라르미노는 바티칸 궁전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이 실천해 오던
내핍생활을 전혀 완화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만을 먹으면서 
거의 아주 필수적인 것 이외에는 가계비 지출을 제한했다.
 
 
그는 군에서 탈영한 한 군인의 몸값을 치렀고, 
‘벽은 감기 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기 방의 커튼을
가난한 사람의 옷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알려진다.
그의 많은 활동 가운데 그는 특히 교황 클레멘스 8세 시대의 신학자로서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두 개의 교리서를 준비했다.

   벨라르미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논쟁은 1616년에 일어난
일로 그가 찬양하던 자기 친구 갈릴레이에게 충고를 해야 했던 것이다.
벨라르미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성서에 위배된다고
결정한 신앙교리 성성을 대신하여 충고를 했다.
이 충고는 아직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것을 가설 이상으로
지나치게 비약시키는 데 대한 하나의 본보기였다.

   벨라르미노는 1621년 9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성 과정은 1627년에 시작했으나 그의 저서에서 연유된 정치적 이유로
인해 지연되다가, 1923년 5월 13일에 복자품에 올랐으며,
1930년 6월 29일 시성되었다.
1931년에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