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6월 10일 福者헨리코, 聖요한 도미니치 님..등

H-Simon 2010. 6. 9. 08:19

 

 

6월 10일(목)

福者헨리코, 聖요한 도미니치 님..
 
 

트레비소의 복자 헨리코(Henri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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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코(6.10)
 
 
성인명 헨리코(Henry)
축일 6월 10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평신도
활동지역 트레비소(Treviso)
활동연도 +1315년
같은이름 앙리, 하인리히, 헨리, 헨리꼬, 헨리꾸스, 헨리쿠스
 


   이탈리아 트렌티노알토아디제(Trentino-Alto Adige)

볼차노(Bolzano)에서 태어난 헨리쿠스는 부모가 너무나 가난하여

읽고 쓰는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장성하였다.

그는 트레비소로 나가 날품팔이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자신의 적은 수입으로 가난한 이를 즐겨 도우며 살았다.

그는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을 생활의 목표로 삼고 지냈다.

 

그는 매일 미사 영성체를 하고 고해성사도 보았는데,

그것은 세심증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순결을 보전하는

방편으로 생각하였다.

   한번은 좀 더 먼 곳에 있는 지방으로 일하러 갔을 때,

주인의 방과 빵을 거저 주었으나 그것을 먹지 않고 매일같이 문전걸식하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운명하고 말았다.

 

주민들은 그의 높은 성덕을 알아보고 그의 유해를 대성당으로 옮기고

성대히 장례를 지냈는데, 연일 기적이 일어났다.

교황 베네딕투스 14세는 그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다.

  
 
   요한 도미니치(6.10)
 
 
성인명 요한 도미니치(John Dominici)
축일 6월 10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추기경
활동지역  
활동연도 1376?-1419년
같은이름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이탈리아 피렌체의 어느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요한 도미니치는

18세 때에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 수도원에서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교육이 부족하고 또 말을 더듬기 때문에 한 때 많은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놀라운 기억력과 항구심은 자신의 모든 약점을 극복하는

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곧 놀라운 설교가와 지도자격인 신학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또한 그는 성서 주해서와 두 편의 논문을 작성했고

토착어로 된 찬미가를 지었다.

   12년 동안의 파리 대학교에서의 공부를 마치자 자신의 모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베네치아(Venezia) 지방을 다니며 설교활동을 하다가

피에졸레(Fiesole)와 베네치아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는 동시에 이탈리아의 개혁 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그가 수도원의 총장을 역임할 때에는 청소년들의 그리스도교

교육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1406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2세를 선출하는 회의에

참석한 이래 교황의 고해신부 겸 고문이 되었다.

 

1407년 산 시스토(San Sisto)의 추기경으로 임명된 그는

당대의 큰 이단들을 예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32년에 승인되었고,

이어 183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제툴리오(6.10)
 
 
성인명 제툴리오(Getulius)
축일 6월 1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20년경
같은이름 게툴리오, 게툴리우스, 제뚤리오, 제뚤리우스, 제툴리우스
 


   성녀 심포로사(Symphorosa, 7월 18일)

남편인 성 게툴리우스는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의 로마군 장교였으나

그의 형제인 성 아만티우스(Amantius)와 함께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부터 퇴직하여 티볼리(Tivoli)의 사비네

언덕에 있던 자신의 저택에서 은거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신자들을 모아 서로 가르치고 돕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러던 중 그들은 황제가 보낸 로마군 호위병

성 카이레알리스(Caerealis)

성 프리미티부스(Primitivus)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러나 두 호위병 역시 성인 형제들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결국 그들은 황제의 명에 따라 재판을 받으며 신앙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집행유예를 제안받기도 했으나 당당히 자신들의 신앙을 변호한 후

티볼리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후에 성녀 심포로사는 그들의 유해를 자신의 토지로 옮겨와 매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