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5월12일 聖네레오, 聖도미니코 님..등

H-Simon 2010. 5. 11. 09:43

 

 
5월12일(수)
聖네레오, 聖도미니코 ..등
  St Domitilla with Sts Nereus and Achilleus
16.jpg
 

 

 

<일  람>  **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네레오 **  Nereus 5월 12일 군인,순교자   +연대미상
2 도미니코 **  Dominic 5월 12일 은수자   +1109년경
3 디오니시오 Dionysius 5월 12일 순교자   +304년
4 성녀 릭트루다 Rictrudis 5월 12일 과부,수녀원장 마르시엔(Marcienne) 612-688년
5 모도알도 Modoaldus 5월 12일 주교 트리어(Trier) +640년경
6 아킬레오☞1   Achilleus 5월 12일 군인,순교자   +연대미상
7 성녀 에우프로시나☞1 Euphrosyne 5월 12일 동정 순교자   +연대미상
8 에텔하르드**  Ethelhard 5월 12일 대주교 캔터베리(Canterbury) +803-805년?
9 에피파니오 Epiphanius 5월 12일 주교 살라미스(Salamis) 310/320-402/403년
10 복녀 요안나 **  Jane 5월 12일 공주,동정녀 포르투갈(Portugal) 1452-1490년
11 복녀

이멜다

람베르티니

Imelda Lambertini 5월 12일 동정녀   1322-1333년
12 제르마노 Germanus 5월 12일 총대주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634/640?-733년경
13 성녀 젬마  Gemma 5월 12일 동정녀 술모나(Sulmona) +1249년
14 성녀 테오도라 ☞1 Theodora 5월 12일 동정 순교자   +연대미상
15 판크라시오 **  Pancras 5월 12일 소년,순교자 로마(Roma) +304년?
16 복자

프란치스코

파트리치

Francis Prtrizzi 5월 12일 선교사 시에나(Siena) +1328년
17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1

Flavia Domitilla 5월 12일 동정 순교자   +연대미상
18 필립보 Philip 5월 12일 신부,선교사 아지로네(Agirone) +연대미상

총 18 성인

 

 

   네레오(5.12)  
 
 
성인명 네레오(Nereus)
축일 5월 1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군인,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연대미상
같은이름 네레우스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와
성 네레오(Nereus)와 성 아킬레오(Achilleus)


   성 네레우스(네레오)와 성 아킬레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의

순교자로서 생몰 연대는 불분명하다.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원래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로마 황제의 친위대 소속 군인이었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축일;12월 11일)가 4세기 말에 쓴 그들의

무덤 묘비에 따르면, 그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손녀이며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

죽이라고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범적 생활에 감동받아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자신들이 받은 명령을 거부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는 이를 ‘신앙의 기적’이라고 표현하였다.

   결국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함께 로마에서 폰자라는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 세 사람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테라치나(Terracina)라는 섬으로 옮겨졌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는

그들의 추방 자체가 하나의 긴 순교록이라고 하였다.

이 섬으로 유배된 후에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화형을,

그리고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아르데아티나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의 묘에

안치되었다.

그들은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공경되어 그 이름이 5세기 로마의

축일표에 기재되었고, 젤라시우스 전례서에는 그들의 축일 미사

전례문이 수록되어 있다.

398년 교황 성 시리키우스(Siricius, 11월 26일)는 그들을 기념하여

성녀 도미틸라의 묘에 성당을 세웠고, 이 성당에서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 교황은 재임 중

그들을 기념하여 다음과 같은 강론을 하였다.

“이 성인들은 세상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발아래 놓았습니다.”

800년에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 6월 12일)는 그들을 기념하여

새 성당을 지었으며, 이 성당은 16세기에 바로니우스 추기경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 7, 14, 17......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도미니코(5.12)  

 

 
성인명 도미니코(Dominic)
축일 5월 1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109년경
같은이름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성 도미니쿠스는 도미니쿠스 드 라 칼차다로도 불리는

'드 라 칼차다'(de la Calzada)라는 말은 '방죽 길'이란 뜻으로

그가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 길을

개척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그는 에스파냐 바스크 지방의 비스케이 만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그는 수차례에 걸쳐서 발바네라)에 있는 베네딕투스

수도원에 입회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무뚝뚝한 그의 외모와 무식한 것이 수도자 생활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리오하(Rioja) 근방에 움막을 짓고 은수자로서

독수생활을 시작하였다.

오스티아(Ostia)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5월 9일)가

그 지방에 설교하러 왔을 때 성 도미니코는 스스로 그를

수행하였고, 성 그레고리우스가 운명할 때까지 그와 함께 머물렀다.

   스승이 운명하자 그는 이전의 은둔생활로 돌아가면서 원래의

은둔소에서 멀지 않은 부레바의 황야에 은둔소를 세웠다.

그곳은 사도 성 야고보(Jacobus, 7월 25일)의 유해가 모셔진

경당으로 가는 순례자들의 통행로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원시림이 가득하고 매우 위험한 곳이라

통행하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었다.

그는 이곳에 움막과 기도소를 짓고 살면서 원목을 베어내고

순례자들을 위한 좋은 길을 만들었다.

그의 노력은 성공적이어서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순례자들을 위한 좋은 길과 다리 그리고 대피소

등을 만들어 편익을 제공하였다.

그는 1109년경에 운명하였으며 그가 머물던 은둔소와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서 그 자체로 유명한 성지가 되었다.

 

 

     ▶요안나(5.12)
 
 
성인명 요안나(Jane)
축일 5월 12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공주, 동정녀
활동지역 포르투갈(Portugal)
활동연도 1452-1490년
같은이름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안, 조안나, 조한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태어난 요안나는 오랜 기도 끝에

알폰소 5세왕의 딸로 태어났다.

3년 뒤 그녀의 병약한 남동생이 태어난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슬기롭고 신심 깊은 유모의 손에 맡겨졌고 어린

시절부터 참회와 기도 생활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세속의 권력이나 부를 떠나 수도생활에 헌신하고자

했으나 아버지와 동생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관례대로 그녀는 어려서부터 왕국의 이익을 위한 결혼을

강요당했고, 아버지와 동생이 무어인들을 상대로 전쟁에

나갔을 때는 섭정을 맡기도 했다.

   가족과 왕실의 오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던 그녀는

마침내 1472년 전쟁에서 승리한 아버지로부터 허락을 받고

아베이로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녀원에 입회하고자 했다.

그 수녀원은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그녀는 인근에 있는

왕실 베네딕토회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로 온전히 수도생활을 할 수 없었고

왕실의 반대 또한 가라앉지 않아 정식으로

서원을 하지는 못했다.

12년 동안의 오랜 기도와 희망 끝에 그녀는 1485년에

아베이로의 도미니코회 수녀원에 입회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적이고 참회의 생활에 전념하였고, 자신의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일들을 하며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수입은 가난한 이들과

 포로로 잡혀간 이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69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에

의해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