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5월 4일 福者요한 마르탱 모예, 聖 플로리아노님..등

H-Simon 2010. 5. 3. 20:26

 

 
5월 4일(화)
福者요한 마르탱 모예, 聖 플로리아노..등
 

 

 

 

 

복자 요한 마르탱 모예(Joannes Martinus Moye)

 

 

 

 

16.jpg

 

 <일  람>  **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복녀 가타리나 ** Catherine 5월 4일 동정녀 파르코담(Parc-aux-Dames) +13세기경
2 고데하르도 Godehard 5월 4일 주교 힐데스하임(Hildesheim) 960-1038년
3 복자 그레고리오 첼리** Gregory Celli 5월 4일 수사 베루치오(Verucchio) +1343년
4 네포시아노 Nepotian 5월 4일 신부,증거자 알티노(Altino) +395년
5 로베르토 로렌스 Robert Lawrence 5월 4일 신부,순교자 영국(UK) +1535년
6 리카르도 레이놀즈 Richard Reynolds 5월 4일 신부,순교자 영국(UK) 1490-1535년
7 복자 미카엘 지드로익** Michael Giedroyc 5월 4일 증거자   +1485년
8 바울리노 Paulinus 5월 4일 순교자 쾰른(Koln) +연대미상
9 바울리노 Paulinus 5월 4일 주교 시니가글리아(Sinigaglia) +826년
10 베네리오 Venerius 5월 4일 주교 밀라노(Milano) +409년
11 사체르도스 Sacerdos 5월 4일 주교 리모주(Limoges) 670-720년
12 실바노 Silvanus 5월 4일 주교,순교자 가자(Gaza) +311년
13

아우구스티노

         웹스터

Augustine Webster 5월 4일 수도원장,순교자 영국(UK) +1535년
14 복자 요한 마르탱 모예 John Martin Moye 5월 4일 설립자,신부   1730-1793년
15 요한 후톤 ** John Houghton 5월 4일 신부,순교자 영국(UK) +1535년
16 치리아코 Cyriacus 5월 4일 주교,순교자 안코나(Ancona) +133년경/4세기경?
17 성녀 쿠네군다 Cunegundes 5월 4일 동정녀   +1052년경
18 쿠르코도모 Curcodomus 5월 4일 부제 오세르(Auxerre) +3세기
19 성녀 펠라지아 Pelagia 5월 4일 동정 순교자 타르수스(Tarsus) +300년경
20 포르피리오 Porphyry 5월 4일 신부,순교자 카메리노(Camerino) +250년
21 플로리아노 ** Florian 5월 4일 순교자 로어흐(Lorch) +304년

총 21 성인

 

 

 

    ▶요한 마르탱 모예(5.4)
 
 
성인명 요한 마르탱 모예(John Martin Moye)
축일 5월 4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설립자, 신부
활동지역  
활동연도 1730-1793년
같은이름 마르땡,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노, 마르티누스, 마틴,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프랑스 로렌지방 태생의 요한 마르탱 모예는 스트라스부르의

예수회 대학교와 메스의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754년 메스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그는 가난한 시골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고,

1767년 많은 어려움 중에도 천주 섭리의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같은 해에 생디에 신학교의 학장이 되었지만 선교사가 되고픈

열망에 결국 1769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1773년에 중국 사천(四川) 교구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반복되는 위협과 투옥 중에도 끊임없이 신앙을 선포하였고,

천주 섭리 수녀회의 회칙을 따르는

‘그리스도인 동정녀회’를 설립하여 병든 이들을 돌보고 자신들의 집에서

여자와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고된 노동과 질병으로 인해 그는 1784년에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로렌과 알자스 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그는 프랑스 혁명 중에

추방되어 수녀회와 함께 오늘날 독일 지방인 트리어로 이동하였다.

프랑스 군대가 트리어를 포위했을 때 그 도시에는 장티푸스가 만연했고,

그와 그의 수녀회는 헌신적으로 병든 이들을 돌보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요한 마르탱 모예 신부 역시 같은 병에 걸려 선종하였다.

그는 1954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복자 요한 마르탱 모예(Joannes Martinus Moye)

 

 

 

 

     ▶가타리나(5.4)
 
 
성인명 가타리나(Catherine)
축일 5월 4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동정녀
활동지역 파르코담(Parc-aux-Dames)
활동연도 +13세기경
같은이름 까따리나, 라헬, 카타리나, 캐서린
 


   카타리나는 유대인의 딸로 오늘날의 벨기에 루뱅에서 살았다.

그녀의 집을 찾는 손님 중에 브라반트(Brabant) 대공의 지도신부가 있었는데,

카타리나는 그와 더불어 종교적인 주제를 놓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그녀가 12세 되던 해였다. 어려서부터 귀여운 라헬이라고도 불리던 그녀는

어느 날 그 사제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때부터 그 사제는 라헬을 가르쳐서 훌륭한 신앙을 갖추게 되었으나,

그녀의 부친이 이를 눈치 채고 그리스도교적인 영향을 받을 수 없도록

그녀를 라인 강 넘어 먼 곳으로 보내기로 결정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라헬은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성모님이 그녀에게 지팡이를 주면서 도망가라고 일러주셨다.

그녀는 즉시 일어나 집을 빠져나왔다.

그 후 사제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린 후에 그 사제의 도움으로

시토회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그곳은 고향에서 불과 2.4km 정도 떨어진 파르코담 수녀원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세례를 받고 카타리나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의 부친이 루뱅의 주교에게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자

다시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에게 간청하였다.

결국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쾰른(Koln)의 대주교인

엔겔베르투스가 잘 수습하였기 때문에 카타리나는 수도원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훌륭한 수덕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환시와 기적 등으로 유명하였다.

 

 

    ▶그레고리오 첼리(5.4)
 
 
성인명 그레고리오 첼리(Gregory Celli)
축일 5월 4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수사
활동지역 베루치오(Verucchio)
활동연도 +1343년
같은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이탈리아 리미니(Rimini) 교구의 베루치오에서 태어난 그레고리우스 첼리는

15세 때에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녀 모니카에게 심취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10여 년 동안 수도원에 살면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며 이단으로

기울어지던 많은 이들을 개종시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수도원을 세운 그레고리우스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에

형제들이 그의 엄격한 생활과 명성을 시기하여 집안의 토지에 지은

수도원에서 그를 쫓아냈다.

그는 다행히 리에티(Rieti) 교외의 몬테 카르네리오에 있는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서 118세의 일기로 선종할 때까지 살았다.

그는 비 오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다.

 

 

     ▶미카엘 지드로익(5.4)
 
 
성인명 미카엘 지드로익(Michael Giedroyc)
축일 5월 4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증거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485년
같은이름 마이클, 미가엘, 미구엘, 미키
 


   리투아니아의 빌나 근교에서 어느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 미카엘 지드로익은

머리는 크고 몸집이 작았을 뿐만 아니라 팔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고,

어릴 때의 사고 때문에 다리까지 사용할 없게 되었다.

 

그는 건강 때문에 학업을 자주 중단하였다.

그러나 신심은 돈독하였으므로 어릴 때부터 그는 고행을 실천하고 말을

적게 했으며, 1주일에 4일은 단식하고 가능하면 숨은 생활을 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는 폴란드 크라쿠프(Krakow)의 메트로 성모 수도원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하였지만 그의 거처와 성당 왕래만을

허용 받았을 뿐이었다.

   이런 조건에서도 그는 온종일 기도로 보냈고,

고기는 전혀 입에 대지도 않고 오로지 채소만 먹을 뿐이었다.

그의 고행은 극에 달한 듯하였고, 또 병중이거나 노령에도

조금도 완화하지 않았다.

이런 거룩한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온갖 은혜를 허락하셨는데,

한 번은 성당의 십자가에서 내려주신 말씀을 듣기도 했다.

그 외에도 그는 예언과 기적의 은혜까지 받았다.

 

 

    ▶플로리아노(5.4)  
 
 
성인명 플로리아노(Florian)
축일 5월 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로어흐(Lorch)
활동연도 +304년
같은이름 플로리아누스, 플로리안

 


   오스트리아 지방 노리쿰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의 장교이던

성 플로리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선언하고 집정관인 아퀼리누스에게 자수하였다.

그는 온갖 고문을 당한 후 몸에 큰 돌을 매단 채 엠스강에 던져지는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한 신심 깊은 여인에 의해 수습되어 로어흐 근방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모셨다가 1138년에 다시 로마로 옮겼다.

1184년 교황 루키우스 3세는 성인의 유해 일부를 폴란드의 카시미르 왕과

크라쿠프의 주교에게 주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성 플로리아누스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폴란드에서도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는 소방관들의 수호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