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5월2일 聖아나스타시아, 聖女마틸다님..등

H-Simon 2010. 5. 1. 18:55

 

 

5월2일(일)

 

聖아나스타시아, 聖女마틸다님..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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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Athanasius)

 

 

 

 <일  람>  **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글루비아스 Gluvias 5월 2일 수도승 콘월(Cornwall) +6세기경
2 네오폴로 Neopolus 5월 2일 순교자   +304년
3 론지노 Longinus 5월 2일 주교,순교자 아프리카(Africa) +485년
4 성녀 마팔다 **  Mafalda 5월 2일 공주,수녀 포르투갈(Portugal) +1252년경
5 발데베르토 Waldebert 5월 2일 수도원장 뤽세이유(Luxeuil) +665-668년경
6 발렌티노 Valentine 5월 2일 주교 제노바(Genova) +307년
7 베르티노 Bertinus 5월 2일 수도승 생베르탱(Saint-Bertin) +699년
8 성녀 비보라다 **  Wiborada 5월 2일 동정 순교자   +926년
9 빈데미알리스 Vindemialis 5월 2일 주교,순교자 아프리카(Africa) +485년
10 사투르니노 Saturninus 5월 2일 순교자   +304년
11 아타나시오 **  Athanasius 5월 2일 주교,교부,교회학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295?-373년
12 에우제니오 Eugene 5월 2일 주교,순교자 아프리카(Africa) +485년
13 엑스수페리오 Exsuperius 5월 2일 순교자 팜필리아(Pamphlia) +127-140년경
14 울탄 Ultan 5월 2일 수도원장 페론(Peronne) +686년
15 제르마노 Germanus 5월 2일 주교,순교자 노르망디(Normandie) +460년경
16 제르마노 Germanus 5월 2일 순교자   +304년
17 성녀 조에 Zoe 5월 2일 순교자 팜필리아(Pamphlia) +127-140년경
18 첼레스티노 Celestine 5월 2일 순교자   +304년
19 치리아코 Cyriacus 5월 2일 순교자 팜필리아(Pamphlia) +127-140년경
20 복자 콘라도 **  Conrad 5월 2일 은수자 셀덴뷔렌(Seldenburen) +1126년
21 테오둘로 Theodulus 5월 2일 순교자 팜필리아(Pamphlia) +127-140년경
22 펠릭스 Felix 5월 2일 부제,순교자 세비야(Sevilla) +연대미상

총 22 성인

 

 

   마팔다(5.2)
 
 
성인명 마팔다(Mafalda)
축일 5월 2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공주, 수녀
활동지역 포르투갈(Portugal)
활동연도 +1252년경
같은이름 마띨다, 마틸다

 


   포르투갈의 국왕 산초 1세의 딸인 성녀 마팔다는 12세경에

그녀의 젊은 사촌인 카스티야의 헨리쿠스 1세 왕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교황청으로부터 혈족에 의한 결혼은 무효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 즉시 성녀 마팔다는 포르투갈로 돌아와서 아루카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당시 그 수녀원은 규율이 너무 느슨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시토회의 규칙을

도입하여 맨땅에서 잠을 자거나 기도 중에 밤을 새는 등

엄격한 생활을 추구하였다.

 

또한 그녀는 아름다운 포르투 주교좌성당을 재건하고 순례자들을 위한 집을

세웠으며, 탈메다 강 위에 다리를 건설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때가 온 것을 알고는 재 위에 누워 임종을 맞이하면서

 “주님, 당신 안에 있기가 소원이나이다.” 하는 말을 남기고 선종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793년에 승인되었다. 그녀는 마틸다(Matilda)로도 불린다.

 

 

    ▶비보라다(5.2)
 
 
성인명 비보라다(Wiborada)
축일 5월 2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926년
같은이름 귀보라, 바이브라트, 위보라다

 


   성녀 비보라다는 스위스의 클링냐(Klingna)에서 태어났고,

프랑스어로는 귀보라, 독일어로는 바이브라트 라고 부른다.

 

그녀는 슈바벤의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부모의 집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오빠 한 명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후부터 그녀도 장크트 갈렌 수도원의

수도복을 입었고, 수도원 도서실의 수많은 책을 장정하는 일을 하였다.

양친의 사망 후 그녀는 사제인 오빠에게서 라틴어를 배웠으며,

성무일도를 함께 바칠 정도까지 발전하였다.

이들 남매의 집은 일종의 구호소였다.

   그 후 그들은 로마(Roma) 순례를 하였다.

그런 다음 그녀는 은수생활을 꿈꾸고 장크트갈렌 수도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내다가 915년경부터 성 마뇨 성당 곁에 있는 움막에서 살았다.

여기서 그녀는 많은 예언과 기적을 베풀어 유명인사가 되었다.

 

특히 그녀는 헝가리인의 침략을 예언했는데,

장크트갈렌의 수도자들은 그녀의 말대로 피신했으나 자기 자신은 움막에서

그대로 살다가 그들의 손에 처참하게 순교하였다.

그녀는 1047년 교황 클레멘스 2세(Clemen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아타나시오(5.2)
 
 
성인명 아타나시오(Athanasius)
축일 5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교부, 교회학자
활동지역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연도 295?-373년
같은이름 아따나시오, 아따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

 


   아마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으로 여겨지는

성 아타나시우스(아타나시오)는 잘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특히 성경과 신학이 뛰어났다.

318년 부제로 서품된 후 자기 고향의 알렉산데르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했던 325년의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에

알렉산데르 주교를 수행하여 참석하였다.

3년 뒤인 328년 4월 17일 알렉산데르 주교가 사망한 뒤

그 자신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이집트 아리우스파의 심한 반발에 직면하였는데,

이러한 반기는 지중해 제국 전역으로 무섭게 파급되었고,

아리우스를 지원하던 멜레티우스(Meletius) 이단도 덩달아 기세를 올렸다.

물론 이런 세력 뒤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원이 있었다.

 

그는 335년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로 첫 번째 유배되었다.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하고,

콘스탄티누스 2세가 서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새 황제는 성 아타나시우스에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뒤

다음 해에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그의 직위를 복권시켰다.

그러나 성 아타나시우스는 반대파에 의해 2년 후 재차 추방되었다.

이 때 그는 로마(Roma)로 가서 7년 동안 머물러야 했다.

   346년부터 356년까지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는 가장 평화로운

황금의 시간이었고 또 그의 주요 저서들도 이때에 나왔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인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그를 추방키로 하고

군인들을 보냈다.

체포 위험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성 아타나시우스는 이집트의

사막 은수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으며, 이곳에서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361년에 죽기까지 자기 교구민들을 지도하였다.

그 이후에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두 차례나 유배를 더 당하였고,

366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평화롭게 자기 교회를 다스리고 사목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날의 모든 갈등과 폭력으로 인하여 피폐된 교회들을 재건하고,

아픈 상처들을 치료하는데 주력하면서,

저술과 강론을 통하여 위대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신체적 조건으로 볼 때는 작은 사람이었으나

아주 강인하고 정신력이 뛰어났다.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파문하기로 결정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하는 데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평신도들도 우왕좌왕하였고,

수많은 주교들도 주저하였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성 아타나시우스는 존 헨리 뉴만의 말대로,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 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였다.”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저술한 그의 뛰어난 저술과 연설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저서들을 많이 남겼는데,

 “안토니우스의 생애”(Vita Antonii)를 비롯하여 성서 주석,

시편 주해 등을 남겼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대 바실리우스(Basilius, 1월 2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

그리고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월 2일)와 함께

그리스의 교회학자이자,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유배 중에 저술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보낸 해명”(Apologia ad Imperatorem Constantium),

 “수도자들에게 보낸 아리우스주의의 역사”(Historia Arianorum ad Monachos)

 등이 있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콘라도(5.2)
 
 
성인명 콘라도(Conrad)
축일 5월 2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셀덴뷔렌(Seldenburen)
활동연도 +1126년
같은이름 콘라두스, 콘라드, 콘래드

 


   스위스 중부의 유명한 엥겔베르크 대수도원의 건설자인

콘라두스(콘라도)는 셀덴뷔렌 귀족 가문 출신으로 대부분의 유산을

수도원 건설에 희사하였다.

 

이것은 그가 성모 마리아를 환시로 보고 그 계시를 따른 것이라고 한다.

건설은 다소 장애가 생겨 지연되었으나 완공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 후 그는 세속을 떠나 아델렐무스 원장으로부터 수도복을 받고

평수사가 되었다.

그러나 원장의 부름을 받고 취리히로 향하던 중에

그를 미워하던 사람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콘라두스의 유해는 엥겔베르크 대수도원에 안장되었으나

수도원이 불탔던 1729년까지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본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