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2월10일*聖女스콜라스티카, 福女클라라님..등*

H-Simon 2010. 2. 9. 14:12

 

 
2월10일(수) 
*聖女스콜라스티카, 福女클라라님..등*

    

 

  

 

 

  성 베네딕토(Benedictus)와 성녀 스콜라스티카(Scholastica)  남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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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귈리엘모 ** Guilielmus 2월 10일 은수자 말레발(Maleval!) +1157년
2 데시데라토 Desideratus 2월 10일 주교 클레르몽(Clermont) +6세기경
3 성녀 발데군다 Baldegundis 2월 10일 수녀원장 +580년
4 성녀 소테리스** Soteris 2월 10일 동정 순교자 로마(Roma) +304년
5 성녀 스콜라스티카 ** Scholastica 2월 10일 수녀원장 480?-555/560년?
6 실바노 Silvanus 2월 10일 주교,증거자 테라치나(Terracina) +연대미상
7 아만시오 Amantius 2월 10일 군인,순교자 +120년
8 성녀 아우스트레베르타** Austreberta 2월 10일 동정녀 파빌리(Pavilly) 630-704년
9 아포니오 Aponius 2월 10일 순교자 +1세기경
10 안드레아 Andrew 2월 10일 순교자 +1세기경
11 이레네오 Irenaeus 2월 10일 군인,순교자 +120년
12 조티코 Zoticus 2월 10일 군인,순교자 +120년
13 복녀 클라라 ** Clare 2월 10일 과부 리미니(Rimini) 1282-1346년경
14 트룸윈 Trumwin 2월 10일 주교 휘트비(Whitby) +700년경
15 프로타디오 Prothadius 2월 10일 주교 브장송(Besanion) +624년
16 후고 Hugh 2월 10일 신부,수도원장 포세스(Fosses) +1164년
17 히야친토 Hyacinth 2월 10일 군인,순교자 +120년
총 17 성인
 

                         

 

 

 

 ▶스콜라스티카(2.10)
 
성인명 스콜라스티카(Scholastica)
축일 2월 1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수녀원장
활동지역
활동연도 480?-555/560년?
같은이름 스꼴라스띠까, 스콜라스띠까

 

테라마 피아지오의 성녀 스콜라스티카(Scholastica)와 성인들
(좌~ 사도 성 요한,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 아바스,
성녀 스콜라스티카, 성 세바스티아노,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의 쌍둥이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한 사람으로 살아 왔으나

아마도 부모의 집에서 기거한 듯 보인다.

그 후 그녀는 몬테카시노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았는데, 혼자인지 아니면 공동체

생활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당시에 그녀는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성 베네딕투스를 만난 것 같다.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가 쓴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 33장에 의하면,

성 베네딕투스가 몬테카시노의 대수도원을 설립한 뒤 그곳에서 남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피우마롤라에 베네딕토 수녀원을 설립하여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에게 맡겼다.

그로 인해 성녀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대화집" 33장에는 이들 남매의 유명한 일화가 하나 전해 온다.

성녀 스콜라스티카가 마지막으로 성 베네딕투스를 방문했을 때 성녀는 예년과 같이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베네딕투스 성인이 몇몇 수사들을 데리고 나와

수도원에서 약간 떨어진 어느 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만나서 늘 하던 대로 함께 기도하고 영적 담화를 나누었다.

밤이 되자 성녀는 오빠에게 다음날 아침까지 함께 있기를 간청했으나

베네딕투스 성인은 수도회 규칙에 충실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성녀가 눈물을 흘리며 잠시 기도를 하자 곧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서

 베네딕투스 성인과 수사들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머물게 된 베네딕투스 성인은 “누이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의 뜻을 허락하셨구나. 대체 네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성녀는 “당신은 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주님은 제 말을 귀담아들으셨습니다.

자, 이제 나가서 수도원으로 돌아가 보시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매는 밤새도록 영적인 생활과 천상 생활의 기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마지막 만남이 있은 지 3일 후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운명하였다.

베네딕투스 성인은 누이동생의 시신을 자신을 위해 몬테카시노 수도원 내에 마련해

두었던 무덤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몬테카시노가 붕괴된 후 8세기경에 베네딕투스 성인의 유해와 성녀의 유해는

플뢰리(Fleury)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이탈리아 밖의 지역에서 성녀의 공경이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8세기 말에는 베네딕토회의 시간전례에 성녀의 축일이 수록되었고,

9세기경에는 전세계 수도원에서 이 축일을 기념하였다.

성녀 스콜라스티카에 대한 공경 예절이 전세계의 교회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1-13세기에 이르러서였지만, 로마 전례력에 정식으로 축일이 수록된 것은 18세기경이었다.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주보성녀로 공경받고 있다.

 

 

 

   ▶귈리엘모(2.10)
 
성인명 귈리엘모(Guilielmus)
축일 2월 1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말레발(Maleval!)
활동연도 +1157년
같은이름 굴리엘모, 귈리엘무스, 빌리암, 빌헬름, 윌리암, 윌리엄


   프랑스 태생의 성 귈리엘무스는 한때 프랑스의 군인으로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통회자가 되어 로마를 순례했는데, 여기서 교황 성 에우게니우스 3세

(Eugenius III, 7월 8일)에게 보속을 청하였다. 교황의 명에 따라 그는 다시 예루살렘 순례를

한 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으로 가서 아무도 모르는 은둔소에 숨어버렸다.

그러나 그의 성덕이 차츰 알려지면서 제자들이 모여들자 몬테 브루노에 정착했다가

더욱 한적한 곳을 찾아 헤매던 중 마침내 말레발(또는 말발 Malval)에 안착하였다.

그는 1155년 9월에 그곳의 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맹수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는 알베르투스라고 알려진 제자 한 명만을 키웠다.

그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리날도라 불리는 한 의사가 제자로 살겠다고 들어왔다.

그들이 성 귈리엘무스 은수자회, 곧 귈리엘미트회의 시작이었다.

그 후 이 은수자회는 이탈리아, 프랑스, 플랑드르 그리고 독일로 퍼져나갔으나

나중에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로 통합되었다.

그는 빌리암또는 윌리엄으로도 불린다.

그에 대한 공경은 120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소테리스(2.10)
 
성인명 소테리스(Soteris)
축일 2월 1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로마(Roma)
활동연도 +304년
같은이름 소떼라, 소떼리스, 소떼리아, 소테라, 쏘떼리아, 쏘테리아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는 그의 집안에서 성녀 소테리스를

크게 공경해왔다고 증언하였다.

어느 집정관의 딸이었던 성녀 소테리스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신분과 재산

그리고 한없이 아름다운 모습까지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과 미모 때문에 수없이 많은 유혹과 위험을 당했기

때문에 모든 장신구를 떼어버리고 평민의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그 즈음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녀는 단호히 순교할 결심으로 준비하던 중 그리스도인으로 고발되어

재판관에게 끌려갔다. 재판관은 귀족의 딸이기에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회유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성녀 소테리스는 결국 모진 고문 끝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성녀의 나이는 불과 15세였다고 한다. 그녀는 소테라(Sotera)로도 불린다.

 

 

 

 

 

   ▶아우스트레베르타(2.10)
 
성인명 아우스트레베르타(Austreberta)
축일 2월 1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녀
활동지역 파빌리(Pavilly)
활동연도 630-704년
같은이름 아우스뜨레베르따, 아우스트레베르따, 에우스뜨레베르따, 에우스트레베르따, 에우스트레베르타

 


   성 프라메칠디스(Framechildis)의 딸인 성녀 아우스트레베르타는

프랑스의 테루안교외에서 태어났는데, 신심이 매우 깊었고 항상 교회 일에만 관심을 가졌다.

어느 날 우연히 물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는데,

자기가 쓰지 않은 베일을 쓴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경험 때문에 그녀는 부친의 결혼 강요를 뿌리치기 위하여 오빠의 인도를 받아

궁중을 몰래 빠져나갔다.

그녀는 성 아우도마루스(Audomarus, 9월 9일)를 만나 아브빌(Abbeville) 수도원에서

그의 지도하에 베네딕토회의 수도서원을 발하였다.

결국 부친의 동의를 얻고 아브빌 수도원에서 지내던 그녀는 수녀원장이 되었고,

후에 노르망디 지방에 새로 설립된 파빌리 수도원의 개혁을 돕기 위해 아브빌을 떠났다.

그녀의 신심과 겸손은 만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녀는 에우스트레베르타(Eustreberta)로도 불린다.

 

 

 

 

 

  ▶클라라(2.10)
 
성인명 클라라(Clare)
축일 2월 10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과부
활동지역 리미니(Rimini)
활동연도 1282-1346년경
같은이름 글라라, 끼아라, 클레어, 키아라

 


   이탈리아 리미니의 부유한 집 딸로 태어난 클라라 아골란티는 어려서 결혼하였으나

곧 과부가 되었다. 그러나 남편 집안의 반대자들에 의하여 얼마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부친의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살았고 또 조심성이 없어서 많은 빈축을 샀다고 한다.

30세 되던 해의 어느 날, 그녀는 어느 프란치스코회의 성당에 갔다가

신비스런 목소리를 들었다.

 “클라라야, 아무런 잡념 없이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한 번만 바쳐보아라."

이때부터 그녀는 아주 신중히 처신하게 되었고,

그 얼마 후에는 같은 성당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였다.

큰 충격과 더불어 완전히 개심한 그녀는 작은 형제회의 제3회에 입회하여

보속생활을 시작하였다.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던 그녀는 철로 된 고행복을 입고 철저한 고행을 시작하였다.

지난날의 허영과 육욕을 벌하기 위하여 스스로 허름한 널빤지 위에서 잠을 잤고,

자신의 입맛을 희생하였다.

그녀는 가끔 기아 직전까지 갈 정도로 음식을 절제하였다.

몇몇 부인들이 그녀의 지도하에 재속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어느 해 성 금요일에는 사람들이 그녀의 목에 새끼줄을 매고서 개처럼 끌고

다니게 한 적도 있었다. 또 주님을 본받기 위하여 문전걸식을 하였다.

   이처럼 그녀의 행동이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기 때문에 반대자들도 생겼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의 목마름을 실감하기 위하여 물도 먹지 않고 오랫동안

 지내기도 하였으니, 정말로 놀라운 사람이라고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이런 그녀의 수덕생활은 그녀가 죽으면서 즉시 성녀로 공경을 받는 놀라운 빛을

발하게 하였다. 교황 비오 6세는 1784년에 그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다.

그녀는 흔히 재속 수도자의 앞길을 밝힌 분으로 공경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