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2월7일*福者 바오9세 교황님..등*

H-Simon 2010. 2. 6. 14:02

 

 
2월7일(일) 
*福者 바오9세 교황님..등*
                             

  

 

 

 

 

 

 

 

 

                                                       

복자 비오 9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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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라우렌시오 Laurence 2월 7일 주교 시폰토(Siponto) +546년
2 루카 ** Luke 2월 7일 은수자 +946년경
3 복자 리체리오 Rizzerio 2월 7일 수사 +1236년
4 리카르도 Richard 2월 7일 영국(UK) +720년
5 모세 Moses 2월 7일 주교,은수자 사라센(Saracen) +372년경
6 복자 비오 9세 ** Pius IX 2월 7일 교황 1792-1878년
7 복자 빌리암 솔트무슈** William Sauletmouche 2월 7일 수사,순교자 +1593년
8 아나톨리오 Anatolius 2월 7일 주교 카오르(Cahors) +연대미상
9 아다우코 Adaucus 2월 7일 순교자 +303년경
10 아우굴로 Augulus 2월 7일 주교,순교자 +303년
11 복자 안토니오 ** Anthony 2월 7일 수사 스트론코네(Stroncone) 1381-1461년
12 복자 야고보 살레☞11 James Sales 2월 7일 신부,순교자 +1593년
13 복녀 에우제니아 스멧** Eugenia Smet 2월 7일 설립자 1825-1871년
14

에지디오 마리아

   (성 요셉의)

Aegidius Mary of Saint Joseph 2월 7일 수사 1729-1812년
15 성녀 율리아나 Juliana 2월 7일 과부 볼로냐(Bologna) +435년
16 크리솔리오 Chrysolius 2월 7일 주교,순교자 +4세기
17 테오도로 Theodore 2월 7일 군인,순교자 헤라클레아(Heraclea) +319년
18 복자 토마스 셔우드 Thomas Sherwood 2월 7일 순교자 1551-1578년
19 피델리스 Fidelis 2월 7일 주교 메리다(Merida) +570년
총 19 성인
                       
 

 

 

  

 비오 9세(2.7)
 
성인명 비오 9세(Pius IX)
축일 2월 7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교황
활동지역  
활동연도 1792-1878년
같은이름 비우스, 피오, 피우스

 


   1792년 5월 13일 이탈리아 안코나근처 세니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페레티는 1803년 볼테라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간질병을 얻어 1809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건강이 회복되자 그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로마 대학에서 공부한 후 1819년

 4월 10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때 그는 예수회 회원이 되려고 하였으나 포기하고

로마의 타타 조반니고아원에서 사제로서의 첫 활동을 시작하였다.

   1822년부터 1824년까지 칠레와 페루의 교황대사인 무치 주교를 보좌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이해와 사도적인 열성을 얻고 돌아온 그는, 1825년부터

1827년까지 로마의 산 미셸구호원의 관리 책임을 맡았으며, 1827년에는 스폴레토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32년에는 반성직주의와 교황의 세속권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던

이몰라교구의 교구장으로 전임되었다.

개혁에 대한 그의 입장은 1833년에 라벤나의 대주교 팔코니에리추기경에게

보낸 서한과 1845년에 작성하여 로마로 보낸 “교황령 행정에 관한 고찰들”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자유사상과 행동을 배격하면서

바른 그리스도교적인 환경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밝혔다.

   1840년 추기경으로 임명된 조반니 마리아는 1846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가

사망했을 때는 후보자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나, 그레고리우스 16세의 체제를

계승하려는 보수파들의 대표자인 람브루스키니 추기경이 교황이 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이들에 의해 교황 후보자로 강력히 부상되었다.

그리고 교황 선거가 시작된 지 이틀 만인 1846년 6월 16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이몰라의 주교였던 비오 7세 교황(1800-1823년)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비오라는 이름을 택하였다.

   그는 1846년 회칙 “퀴 플루리부스”(Qui Pluribus)를 통해 사제 지원자들의

엄격한 선발과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같은 해에 수도회성을 설립하여 수도회의 개혁을 촉진하였다.

1848년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이탈리아의 독립과 해방을 주장하는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는 민족적 단합을 지지하였으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거부하여

이탈리아 혁명군에게 쫓겨 교황청을 떠났다가 프랑스군이 로마를 함락했을 때

다시 돌아왔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는 대칙서를 통해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선포함으로써 마리아 신심을 증진시키고

신학적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정치에 있어서 자유주의를 포기하였고,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1859년 로마냐그리고 1860년에는 움브리아와 마르케를 잃었고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와 교황령을 점령하고 이듬해

일방적으로 ‘보장법’을 발표함으로써 교황의 모든 세속주권을 빼앗겼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영성 및 교회문제에 있어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가장 큰 성과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는 또한 현대의 합리주의, 범신론, 종교적 자유주의와 반가톨릭적 형태의

현대철학들을 단죄하여 가톨리시즘을 수호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 그는 이탈리아 정부와 더 멀어졌고, 공의회의 결과로 발생한

이교인 구가톨릭교(Altcatholizismus)와 서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반성직주의 운동을

목격하였다.

한국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교황 비오 9세는 재위중인 1857년

조선 순교자 82명을 가경자로 선포하였고, 1866년 초 조선에 병인박해가

발생했을 때 그 해 12월 19일자 편지를 통해 교우들을 위로하고

박해를 받는 이들에게 위로와 언약된 보상을 상기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적이지도 외교적이지도 않았으며 본질적으로 사목자였다.

하지만 그가 재임할 때의 역사적인 상황,

즉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국가 통일 운동)의 시기는 그를 정치와

연루시켰다.

그는 정치적으로 원만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고 근대 세계와 문명에 대한 이해

또한 충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성과 교회의 엄격한 수도회의 부활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반얀센주의 신심을 일깨우고 재속 성직자와 수도자를 개혁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세속화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격려하였고,

교회 특히 교황의 자주와 독립을 확립하였다.

1878년 2월 7일 사망한 교황 비오 9세의 유해는 1881년 7월 13일 베드로 대성당에서

산 로렌조 성당으로 옮겨졌으며, 1985년부터 그의 영웅적인 삶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함께 시성을 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는 2000년 9월 3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복식에 참여한 약 10만 명의

신자들에게 강론을 통해 비오 9세 교황에 대해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으며 언제나 하느님과 영적인 가치들을 그 무엇보다 우위에 두었다”면서

 “그분은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증오와 비방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교황 비오 9세는 1700년 이후 최연소 교황이었으며 베드로 사도 이후

가장 오랜 기간(32년) 교황직을 수행하였다.

 

 

 

  ▶루카(2.7)
 
성인명 루카(Luke)
축일 2월 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946년경
같은이름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성 루카의 별명은 '타우마투르구스'이며 그리스 출신이다.

그러나 출생지는 아이이나 섬이고, 사라센인들의 침공으로 그리스 중북부 지역인

테살리아로 이주하여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열심하고 순종 잘하는 소년이었고, 양떼를 돌보거나 들일을 거들며 살았다.

그는 가끔 걸인을 먹이기 위해 자신이 굶거나 자기 옷을 벗어

 헐벗은 이에게 주곤 하였다. 그 때문에 부친의 분노를 산 적이 많았다고 한다.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들일을 그만두고 수도자가 되려는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으나 군인들에게 붙잡혀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들이 성 루카에게 묻기를

너는 누구냐 하자,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또다시 수도자가 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래서 그는 코린토스 교외의 요안닛사산에 은둔소를 짓고 은수자로서 18년을

살았다.

   그는 항상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살았지만 때로는 유혹과 밤새도록

씨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기적을 행하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통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가 임종한 자리는 나중에 성당이 되었는데 소테리온이라 부른다.

소테리온은 기적의 장소라는 뜻이다.

 

 

  

 

 

 

 

  ▶빌리암 솔트무슈(2.7)
 
성인명 빌리암 솔트무슈(William Sauletmouche)
축일 2월 7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수사,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593년
같은이름 굴리엘모, 빌헬름, 윌리암, 윌리엄

 


   야고보 살레는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태생으로 부친의 도움으로 빌롱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다가 17세 때에 수련자가 되었다.

그리고 빌리암 솔트무슈는 그 대학에 고용된 젊은이였으나 나중에 평수사가 되었다.

그 후 야고보는 파리(Paris)에서 수학하던 중에 인도 선교를 지망하였다.

 

 

그런데 야고보의 설교 능력과 지도력을 인정한 장상은 그를 보내려다가 취소하고

오버나스(Aubenas)로 파견하였다.

이때 빌리암이 야고보를 수행하였다.

이 지역은 칼뱅파가 주도하는 지역이었다.

야고보의 선교가 매우 성공적인 조짐을 보이자 칼뱅파에서 사람들을 보내어

야고보 신부를 난자하였고, 빌리암은 그의 시신을 움켜잡은 채 운명하였다.

 

 

빌리암 솔트무슈는 윌리엄 솔트무슈 또는 빌헬름 솔트무슈로도 불린다.

그들은 1926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안토니오(2.7)
 
성인명 안토니오(Anthony)
축일 2월 7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수사
활동지역 스트론코네(Stroncone)
활동연도 1381-1461년
같은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지방 스트론코네에서 프란치스코 재속 3회원이던

루이지와 이사벨라 비치의 아들로 태어난 안토니우스 비치는 순탄하게 프란치스코회

평수사로서 수도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2세였다. 건강이 별로 좋지 않던 이 소년은 스스로 엄격한

생활을 선택하고 또 자발적인 기도를 즐겨하는 작은 수도자였다.

26세 때에는 그가 피에졸레의 수련장인 피렌체의 토마스 벨라치를 도와드릴 만큼

크게 성장하였고, 그 후 그가 이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는 소위 프란치스코회 내부의 ‘영적인 형제’ 그룹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또 사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10여 년 동안이나 선교활동에 가담하였다.

후일 그는 카르체리 수도원으로 돌아와서 30여 년 동안이나 극도의 고행을

통하여 겸손의 화신이라 불릴 만큼 높은 덕을 쌓았다.

그는 1461년 2월 7일 80세의 일기로 역사적인 수도원인 아시시의 산다미아노에서

선종했다. 그는 168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 12....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에지디오 마리아(성 요셉의)(2.7)
 
성인명 에지디오 마리아(성 요셉의)(Aegidius Mary of Saint Joseph)
축일 2월 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활동지역  
활동연도 1729-1812년
같은이름 아이기디오, 아이기디우스, 에지디우스, 자일스, 지르, 질르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의 타란토 출신인 성 요셉의 성 에지디우스 마리아는

끈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25세 때에 그는 성 베드로 알칸타라의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문지기로 일생을 보내면서도 병자들에게 깊은 사랑을 전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서 큰 성덕을 쌓았다.

그는 나폴리시내를 돌며 탁발을 하였으며,

그의 손에는 항상 애긍으로 얻은 음식들이 들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 요셉에 대한 신심이 탁월하여 요셉 신심을 크게

전파하였다.

그는 사람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보였으나 하느님의 눈에는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질로도 불린다. 그는 1888년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6년 6월 2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예수님 나를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