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2월 3일 *聖블라시오, 聖안스가리오주교님..등*

H-Simon 2010. 2. 2. 11:44

 

 2월 3일 (수) 
          *聖블라시오, 聖안스가리오주교님..등*
                    
           

 

프란치스코 데 수르바란의 성 블라시오(Blas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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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라우렌시노 Laurentinus 2월 3일 순교자   +3세기
2 라우렌시오 Laurence 2월 3일 주교 스폴레토(Spoleto) +576년
3 레메디오 Remedius 2월 3일 주교 알프스(Alps) +6세기
4 루피치노 Lupicinus 2월 3일 주교 리옹(Lyon) +5세기
5 성녀 마르가리타 Margaret 2월 3일 동정녀 영국(UK) +1192년
6 성녀

마리아

(성 이냐시오의) **

Mary of St. Ignatius 2월 3일 설립자 리옹(Lyon) 1774-1837년
7 복자 마태오 ** Matthew 2월 3일 주교 지르젠티(Girgenti) +1450년
8 성녀 베르부르가 Werburga 2월 3일 수녀원장 체스터(Chester) +700년경
9 성녀 베를린다 Berlinda 2월 3일 동정녀 메에르베케(Meerbeke) +702년
10 블라시오 ** Blaise 2월 3일 주교,순교자 세바스테(Sebaste) +316년경
11 복자 스테파노 벨레시니** Stephen Bellesini 2월 3일 수사   1774-1840년
12 복자 시몬 피다티 ** Simon Fidati 2월 3일 설교가 카쉬아(Cascia) 1295-1348년
13 심프로니오 Symphronius 2월 3일 순교자   +연대미상
14 안스카리오 ** Anschar 2월 3일 대주교,선교사 브레멘-함부르크(Bremen-Hamburg) 801-865년
15 복자 오도리코 ** Odoric 2월 3일 수사 포르데노네(Pordenone) 1285-1331년
16 복자 요한 넬슨 John Nelson 2월 3일 순교자   +1578년
17 이냐시오 Ignatius 2월 3일 순교자   +3세기
18 성녀 이아 Ia 2월 3일 동정녀 콜월(Cornwall) +5세기경
19 성녀 첼라인나 Caellainn 2월 3일 동정녀   +6세기
20 성녀 첼레리나 Celerina 2월 3일 순교자   +3세기
21 첼레리노 Celerinus 2월 3일 부제,순교자 카르타고(Carthago) +250년경
22 티지데 Tigides 2월 3일 주교 알프스(Alps) +6세기
23 펠릭스 Felix 2월 3일 순교자   +연대미상
24 펠릭스 Felix 2월 3일 주교 리옹(Lyon) +5세기
25 필립보 Philip 2월 3일 주교 비엔(Vienne) +578년

26 히폴리토 Hippolytus 2월 3일 순교자   +연대미상
총 26 성인

                            

 

 

 

 

 

  ▶블라시오(2.3)
 
성인명 블라시오(Blaise)
축일 2월 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세바스테(Sebaste)
활동연도 +316년경
같은이름 블라시우스, 블라씨오, 블라씨우스

 


   8세기에 로마의 성 클레멘스 성당에서 성 블라시우스의 전설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그에 따르면 성 블라시우스는 아르메니아(Armenia)의 세바스테의 주교였으며,

로마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카파도키아의 총독인 아그리콜라우스에 의해

붙잡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부유한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서 젊은 나이에 주교로 선출되었다고도 한다.

그는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는 초기에 은수자가 되었는데,

병자들을 치유하고 또 야생 동물들을 보살펴 주는 것을 목격한 어떤 사냥꾼에 의하여

총독 아그리콜라우스에게 끌려가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가 언제 주교가 되었으며 어떻게 활동하였는지를 밝혀줄 역사적 자료들은 거의 없다.

다만 8세기부터 블라시우스에 대한 공경이 동방과 서방 교회에 두루 퍼졌다.

성 블라시우스 축일에는 인후를 축성하는 예절이 전해오는데,

이는 그분이 목에 생선뼈가 걸려 사경을 헤매는 한 소년을 기적적으로 치료한 사실에

근거하며, 이 예식에서 초 두 자루를 사용하는 것은 그 소년의 모친이 옥에 갇힌 그에게

음식과 초를 가져다 준 사실에서 유래한다고 전해온다.

 

 

 

 

 

   ▶마리아(성 이냐시오의)(2.3)
 
성인명 마리아(성 이냐시오의)(Mary of St. Ignatius)
축일 2월 3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리옹(Lyon)
활동연도 1774-1837년
같은이름 글라우디나, 메리, 미리암, 클라우디나, 클로딘, 테브네

 

Claudine Thévenet (1774-1837) 


   성 이냐시오의 성녀 마리아는 프랑스 리옹에서 클라우디나 테브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하였으나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두 명의

형제가 살해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살인자들을 용서하였다.

리옹 근방에서 노동일을 하던 그녀는 1816년 아버지와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조직했는데,

그 공동체는 1818년 리옹의 예수 마리아회로 발전하였으며 가난한 소녀들을

교육하는데 헌신하는 교육 수녀회였다.

이때 클라우디나 테브네는 성 이냐시오의 마리아라는 수도명을 정하고 원장으로서 봉사하였다. 1847년 12월 31일 교황 비오 9세로부터 승인을 받은 그녀의 수녀회는 오늘날 유럽과 인도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 학교, 대학교, 피정의 집 등을 운영하고 있다.

리옹에서 생을 마감한 성녀 마리아는 1981년 10월 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93년 3월 21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마태오(2.3)
 
성인명 마태오(Matthew)
축일 2월 3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주교
활동지역 지르젠티(Girgenti)
활동연도 +1450년
같은이름 마두, 마태우스, 마테오, 마테우스, 매튜
 


   시칠리아의 지르젠티 태생인 마태오(Matthaeus)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일찍이 포기하고,

18세 때에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으나,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시에나(Siena)의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5월 20일)의 명성을 듣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콘벤투알회를 떠나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성 베르나르두스와 함께 이탈리아 전역을 다니면서 설교하였는데,

특히 성직자의 규율이 극히 해이하고 성직매매가 극성을 부리던 시칠리아의

성직자들에게 개심하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르젠티 주민들은 그가 주교로서 봉직해 줄 것을 바라고 호소하여

교황의 동의를 받았다.

그가 첫 번째 수행한 임무는 규율 이완을 막고 성직매매를 금지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적을 만든 결과, 그는 평화를 깨트리고 불화를 조성한다는

누명으로 인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세운 수도원으로 갔으나, 그 수도원의 원장조차도 그를

배척하므로 하는 수 없이 팔레르모에 있는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의

옛 친구에게서 피신처를 얻어 지내다가 선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67년에 승인되었다.

 

 

 

 

   스테파노 벨레시니(2.3)
 
성인명 스테파노 벨레시니(Stephen Bellesini)
축일 2월 3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수사
활동지역  
활동연도 1774-1840년
같은이름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스테파누스는 이탈리아 트렌티노지방의 트렌토출신으로 16세 되던 해에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그는 로마와 볼로냐에서 수학하던 중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여 그의

공동체가 뿔뿔히 흩어지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서 개인적인 신심생활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한편,

어린이들의 종교교육에 정성을 쏟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그는 트렌티노 지방 모든 학교의 장학관으로 임명되어,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가 교황령에 의해 공동체 생활을 재개할 때까지

오로지 이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가 장학관의 직무을 떠날 때 거의 모든 시의원들이 극구 반대했지만,

 

자신의 성소에 따라 볼로냐로 가서 형제들과 재회하였다.

그 후 그는 로마 수도원의 수련장 등을 역임하였다.

몇 년 후 그는 제나차노에 있는 유명한 착한 의견의 어머니 성당의 주임사제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중, 콜레라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그 병에 전염되어 선종하고 말았다.

그는 1904년 12월 27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시몬 피다티(2.3)
 
성인명 시몬 피다티(Simon Fidati)
축일 2월 3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설교가
활동지역 카쉬아(Cascia)
활동연도 1295-1348년
같은이름 사이먼
 


   시몬 피다티의 생애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카쉬아에서 태어났고, 안젤루스 클라레노란 사람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면서부터 내면의 덕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가입하여 비록 짧은 기간 동안 공부하였지만,

1318년경부터 뛰어난 설교가로 등장하였다.

 

그에게는 자연적 은혜 외에도 초자연적 은혜가 충만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주님의 행적에 관하여”란 저서를 펴냈는데,

이것은 친구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으로 된 교리서라고 한다.

그는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육체적 고행이라고 하였으며,

하느님의 명에 따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설교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완성에 도달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33년에 승인되었다.

 

 

 

 

  ▶안스카리오(2.3)
 
성인명 안스카리오(Anschar)
축일 2월 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대주교, 선교사
활동지역 브레멘-함부르크(Bremen-Hamburg)
활동연도 801-865년
같은이름 안스가르, 안스가리오, 안스가리우스, 안스카르, 안스카리우스

 


   프랑스 아미앵(Amiens) 근교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성 안스카리우스는 5세 때

어머니의 사망으로 수도원에서 자랐으며, 814년경 피카르디의

옛 코르비수도원(베네딕토회)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826년에 그는 선교사로서 덴마크에 갔으나 스웨덴에 관한 관심이 더 커서 3년 만에

돌아오고 말았다.

829년에 스웨덴으로 갔다가 1년 만에 다시 돌아와 새로운 코르비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832년에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에 의해 함부르크의 주교로 축성되었고,

스칸디나비아 백성들과 슬라브인들을 돌보라는 교황의 명을 받았다.

845년에는 바이킹(Viking)의 침입으로 13년 동안 선교 활동을 해오던 함부르크가 파괴되어

큰 좌절을 겪었고, 848년에는 브레멘 교구와 파괴된 함부르크 교구의 합병으로

브레멘-함부르크 대교구가 설립되면서 교황 성 니콜라우스 1세(Nicolaus I, 11월 13일)에

의해 초대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다시 덴마크와 스웨덴으로 돌아가서 놀라운 정열로

선교 활동을 재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같은 성공의 그의 뛰어난 설교력, 엄격하고 거룩한 생활

그리고 수많은 기적의 힘이었다.

그러나 성 안스카리우스는 865년 2월 3일 브레멘에서 사망하였는데,

그의 사후 그 모든 선교 사업들이 중단되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아직 그리스도교가 뿌리 내릴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 안스카리우스는 '북유럽의 사도'로 불리며,

스칸디나비아의 선교사이자 사도로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안스가리우스(Ansgarius)로도 불린다.

 

 

 

 

 

    ▶오도리코(2.3)
 
성인명 오도리코(Odoric)
축일 2월 3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수사
활동지역 포르데노네(Pordenone)
활동연도 1285-1331년
같은이름 오데리코, 오데리쿠스, 오도리꼬, 오도리꾸스, 오도리쿠스, 오도리크, 오도릭


   오도리쿠스는 이탈리아의 프리울리(Friuli)에서 태어나 15세 때에 우디네에서

작은 형제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서 하느님만을 섬기려는 사명을 느낀 그는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고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우디네로 돌아와서 주민들에게 설교했는데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다닐

정도로 그의 설교는 성공적이었다.

1321년경에 그는 서 인도에 상륙했고, 1322년과 1328년에는 중국 북부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331년에 우디네에서 선종하였다.

이 모든 것은 그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서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망 때문에

이곳저곳을 다녔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75년에 승인되었다. 그는 오데리쿠스(Odericus)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