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2월2일(화-주님 봉헌축일) *聖고르넬리오, 聖女요안나님..등*

H-Simon 2010. 2. 1. 20:11

 

 
  2월2일(화-주님 봉헌축일) 
  *聖고르넬리오, 聖女요안나님..등*
                             
 
 
    

 주님 봉헌 축일 

 

 

                                         주  님      봉  헌     축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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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성녀 가타리나 ** Catherine 2월 2일 수녀 리치(Ricci) 1522-1590년
2 고르넬리오 ** Cornelius 2월 2일 백부장,베드로의 제자,주교   +1세기
3 라우렌시오 Lawrence 2월 2일 주교 캔터베리(Canterbury) +619년
4 복자 베드로 캄비아노 Peter Cambiano 2월 2일 순교자   1320-1365년
5 브루노 Bruno 2월 2일 순교자 에브즈도르프(Ebsdorf) +880년
6 아달발도 Adalbald 2월 2일 순교자 오스트레반트(Ostrevant) +652년
7 성녀 아델로가 Adeloga 2월 2일 동정녀 키칭겐(Kitzingen) +745년
8 아프로니아노 Apronian 2월 2일 기록 책임자,순교자   +304년
9 성녀 요안나 드 레토낙** Jane de Lestonnac 2월 2일 과부,설립자   1556-1640년
10 칸디도 Candidus 2월 2일 순교자   +연대미상
11 펠리치아노 Felician 2월 2일 순교자   +연대미상
12 포르투나토 Fortunatus 2월 2일 순교자   +연대미상
13 플로스쿨로 Flosculus 2월 2일 주교 오를레앙(Orleans) +480년?
14 피르모 Firmus 2월 2일 순교자   +연대미상
총 14 성인

 

                              

 

 

 

 

 

 

   ▶가타리나(2.2)

 

 

 
성인명 가타리나(Catherine)
축일 2월 2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수녀
활동지역 리치(Ricci)
활동연도 1522-1590년
같은이름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성녀 리치의 카타리나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프라토(Prato)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의 수녀이다.

그녀는 좋은 감각과 정성을 다하여 맡아온 수련장과 장상직을 사임하였는데,

그녀의 놀라운 신앙 체험들은 많은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면, 매주일 같은 시간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탈혼하였는데,

이때 그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흠뻑 취하곤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2년 동안이나 정기적으로 일어났다.

   성녀 카타리나의 영향은 수녀원의 벽 안에서만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편지에서 나타난 그대로 교회의 개혁 운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성녀 카타리나는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와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

그리고 교황 성 비오 5세(Pius V, 4월 30일)와 함께

현대 교회의 개혁자로서 높은 칭송을 받아왔다.

성녀 카타리나는 1590년 2월 2일 선종하였고, 1732년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46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고르넬리오(2.2)
 
성인명 고르넬리오(Cornelius)
축일 2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백부장, 베드로의 제자, 주교
활동지역  
활동연도 +1세기
같은이름 고르넬리우스, 꼬르넬리오, 꼬르넬리우스, 코르넬리오, 코르넬리우스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 주재 로마군 보병대의 백인대장이던

성 코르넬리우스는 하느님께서 신비로운 영상 가운데 당신 천사를 통해

요빠에 있던 사도 베드로(Petrus)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오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사도 베드로를 모셔왔고,

그로부터 자신은 물론 온 집안사람들 모두 세례를 받았다(사도 10,1-48).

그때부터 성 코르넬리우스는 사도 베드로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성 코르넬리우스는 카이사레아의 첫 주교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

 

 

 

 

   ▶요안나 드 레토낙(2.2)
 
성인명 요안나 드 레토낙(Jane de Lestonnac)
축일 2월 2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과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556-1640년
같은이름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안, 조안나, 조한나

 


   성녀 요안나 드 레토낙은 프랑스의 보르도에서 저명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당대의 유명한 인문주의 철학자였던 미셸 에켐 드 몽테뉴의 조카이다.

당시 프랑스는 국가의 분열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분열을 가져온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혼란을 겪고 있었다.

성녀 요안나의 어머니는 칼뱅주의(Calvinism)에 빠져 그 누구의 권고도

듣지 않았다.

다행히도 성녀 요안나는 아버지와 삼촌 덕분에 자기 종교로 이끌고자 했던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성녀 요안나는 17살에 가스통 드 몽페랑과 결혼하여 여덟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그녀는 1597년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41살에

과부가 되었고 네 아이도 어려서 잃었다.

그녀는 나머지 네 자녀가 모두 자라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돌보았다.

그녀의 두 딸인 마르타(Martha)와 막달레나(Magdalena)는 보르도에 있는 수도원에서

서원을 했고 아들 프란치스코(Franciscus)는 결혼을 했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막내딸을 아들에게 맡기고 성녀 요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온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1603년 툴루즈의 개혁 시토회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수도원의 엄격한 생활은 그녀의 건강을 해쳤고 그녀는 서원을 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툴루즈 수도원에서 지냈던 마지막 밤에 성녀 요안나는

하느님의 특별한 비추임을 체험하였다.

그것은 설립자로서의 소명과 마리아 영성에 대한 직관이었다.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려는 그녀의 계획은 몇 년에 걸쳐 조금씩 윤곽이

드러났다.

즉 청소년 교육이라는 과제와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에도 마음을 써야 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정리되었다.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젊은 소녀들을 모아 라 모드(La Mothe)에 있는

 자신의 땅에서 2년 동안 준비의 시간을 가졌고, 보르도에 극심한 역병이

발생했을 때 용감하게 시민들을 간호하였다.

그러던 중 1605년에 새로 부임한 예수회의 요한 드 보르드신부와 라이문두스신부를 비롯한

몇 명의 사제들이 영적으로 그녀의 헌신을 알아보고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되었다.

   당시 보르도에서는 특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이 큰 문제였다.

대부분 칼뱅주의에 빠진 여교사들이 소녀들의 교육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당시 예수회가 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것처럼 가톨릭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던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맡아줄 여성 수도회의 설립이

절실하던 때였다.

요한 신부와 성녀 요안나는 이런 점에서 서로 뜻을 같이 하고

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곧바로 수도회 설립 작업에

들어갔다.

1606년 3월 6일 성녀 요안나는 요한 신부의 도움으로 보르도의 대주교를 설득하여

특별히 여자 아이들의 교육을 직접적인 사도직으로 하는

여성 수도회인 마리아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요안나의 마리아회는 1607년 교황 바오로 5세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1610년 마침내 보르도에 마리아회의 첫 번째 수녀원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수도회의 사도직을 실현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소녀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한때 그녀는 다른 수녀들의 음모에 휘말려 희생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모진 시련을 인내로써 극복하였다.

1640년 2월 2일 96세의 일기로 선종하여 보르도에 묻힌 성녀 요안나의 마리아회는

프랑스 전역뿐만 아니라 에스파냐를 비롯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녀는 1900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9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주님 봉헌 축일(2월 2일)

 

 

     
 

                               

 

                                                   나기정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우리는 일상에서 수없이 많은 만남을 갖는다. 일을 하면서 만나고 놀기 위해서도 만난다.

또 보금자리에서도 만남이 있다. 그뿐이 아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만남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손쉽게 그 사람을 만난다.

또 편지를 통해 그의 마음을 읽으며, 전화로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그의 생각과 만나고,

선물을 받음으로써 그의 정성스런 마음과 만난다.


그렇다면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함께 있기 위한 욕구' 때문이다.

사람은 함께 살도록 하느님께서 만드셨다. 그러기에 수없이 많은 만남을 가지며 사는 것이다.

비록 시간적으로 또는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나기를 되풀이하지만,

 만남은 '함께하려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누구를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길을 떠나고,

전화를 걸고 편지나 카드를 보내고, 또 마음을 담은 정성의 선물이나 꽃을 전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만나야 할 그를 무한정 기다리기도 한다.


해마다 2월 2일에 교회는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낸다.

이날은 주님의 성탄과 공현을 마무리 짓는 축일이기도 하다.

전례주년에서 성탄시기는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인 주님 세례 축일로 공식적으로 마감하지만,

주님 봉헌 축일은 성탄 축일과 연결된 축일이다. 이날은 예수 성탄 대축일에서 꼭 40일째가

되는 날이다.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지내면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다. 인간으로 오신 겸손한 모습의 주님을

만나뵈었다.

그리고 그분이 탄생하신 지 40일째 되는 날 유다 전통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성전에서 주님의 봉헌에 앞서

예언자 시므온이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나뵙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날 '주님 봉헌 축일'은 두 가지 내용을 기념한다.

평생을 기다려온 시므온 예언자처럼 주님을 만나 함께 지내게 되었고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듯이

우리 자신도 만나서 함께 계시는 주님과 하나되어 봉헌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축일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가?

교회는 일찍부터 이 축일을 지내왔다. 4세기말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 축일을 기념하였고,

5세기 중엽에 초 봉헌 행렬을 시작하였다. 6세기에 이미 이웃 동방 교회들에 이 축일이 전파되어 기념하였다.

이때에는 시므온 예언자가 주님을 만났던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만남'의 축제를 지냈다.

7세기 후반 이후로 로마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고 다른 서방 교회에도 전파되었다.

처음에는 동방 교회들처럼 '만남의 축제일', 또는 '성 시므온의 날'로 지냈다가 성모 신심과

성모 축일이 발달하여, '성모 취결례(정화예식)'로 불리게 되었다. 주님의 축일이 성모의 축일로 바뀌어

오랫동안 지내게 된 것이다.


또 중세 후반기에는 촛불을 들고 행렬하는 것 때문에 한때 '성촉절(聖燭節)'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례는 이 축일의 본디 모습을 되찾아

시므온 예언자의 '만남'의 의미, 축복받은 초를 들고 성당으로 들어가는 행렬 등의 의미를 강조하고

원래대로 주님의 축일로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날 우리는 기도할 때 쓸 초를 축복하고 또 봉헌한다.

초는 자신을 태워서 미약하지만 불을 켜서 어둠을 밝히는 빛이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에서 일찍부터 제대와 함께 빛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전례표지로 초를 써왔다.

이날 교회에서 초를 봉헌하고 촛불 행렬을 하는 것은 주님 봉헌 축일의 의미에 가장 알맞은 것이다.


우리는 흔히 본당에서 이날 기도할 때 켤 초를 갖고 와서 축복을 받고 또 본당에서 쓸 초들을 봉헌한다.

완전한 봉헌은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그 결과물이나 몫을 드린다.

초를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일치하여 나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시므온이 주님을 만나 함께했듯이, 봉헌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는 주님과 만나야 한다.

그것이 시므온이 주님을 만난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초를 들고 행렬하는 것을 잘 볼 수 없다.

주님 봉헌 축일이 교우들이 많이 참석하지 않는 춥고 이른 평일 아침에 미사가 거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를 들고 행렬하는 것은, 우리를 만나러 오신 주님을 찾아 불을 밝혀 들고

 하느님의 집(또는 제대)으로 나아가는 의미를 더 잘 드러내준다.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성탄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자.

 더 나아가 우리도 주님을 찾아 만나고 함께하는 기쁨으로 주님의 봉헌에 동참하여 나 자신을 봉헌하도록 하자.

성전에 봉헌되신 주님의 봉헌 축일에 성탄을 기억하고 나의 새 삶을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할 것이다.

                     [이글은 대구대교구 나기정 신부님께서 경향잡지(1999년 2월)에 기고하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