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12월 29일(화)서소문 형장에 7위께서 순교하신 날

H-Simon 2009. 12. 28. 08:47

 

 
12월 29일(화)
       서소문 형장에 7위께서 순교하신 날  

          

 

 

                      

 

   

   * 오는 1월에는 12위께서 순교하셨습니다.

          

최창흡 베드로
 
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12.29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최창흡님은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형 최창현(崔昌顯)이 순교한 뒤로는 외교인과 다름없는
냉담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서른 살쯤 교우인 손소벽(孫小碧)님과 혼인한 뒤로는 다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아내와 함께
 대세를 받고 이 때부터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창흡님은 순교를 결심하였고,
 6월 친정으로 피신해 온 딸 최영이(崔榮伊)님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사위 조신철(趙信喆)님이 맡겨 둔 교회 서적과 성물 때문에 포청에서
혹형을 받았으나 잘 참아 냈다.
형조에서도 여러 차례의 고문을 이겨 내고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시었다.
*최창흡님의 아내 손소벽님, 딸 최영이님, 사위 조신천님이 모두 순교하심

 

 

 

 

 

조증이 바르바라
 
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12.29
 
 


조증이님은 경기도 이천(利川)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16세 때 남이관(南履灌)님과 혼인하였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 조 프란치스코님과 시부모가 순교하고 남편도 유배를 당하게 되자
 친정으로 내려가 10여 년을 살았다.
그 뒤 서른 살쯤 다시 상경하여 정하상(丁夏祥)님을 도우며 선교사 영입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832년 남편이 30여년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돌보며 공소를 세우고, 교회와 교우들을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이천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체포되었다.
남이관을 잡으려는 형리들로부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58세에
순교하시었다.
 
*조증이 바르바라님의 남편 남이관 세바스티아노님은 3개월 전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심

 

 

 

 

한영이 막달레나
 
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12.29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한영이님은 혼기에 이르러 권 진사(進士)라는 양반의
후처로 들어가 딸 권진이(權珍伊)를 두었고,
남편이 대세를 받고 죽으면서 천주교를 믿으라는 유언을 남기자
딸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 뒤 신앙 생활을 하고자 딸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 집에 몸붙여 살다가
1839년 7월 17일 딸과 딸의 친구인 순교자 이경이(李瓊伊)님과 함께 체포되었다.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6세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시었다.
 
* 한영이 막달레나님의 딸 권진이 아가타님은 어머니의 한 달 후,
  21세로 당고개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심

 

 

 

 

 

현경련 베네딕타
 
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12.29
 
 


서울의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난 현경련님은 어려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 현계흠(玄啓欽)님이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 사건과
관련되어 순교한 뒤 어머니를 따라 자주 이사다니며 살았다.
17세 때 최창현(崔昌顯)의 아들과 혼인하였으나 3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살았다.
규칙적인 독서와 기도 생활을 하였고, 여회장직을 맡아 보며 교회 일에 적극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현경련님은 잠시 피신했었으나
6월에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주교의 피신처를 알아 내려는 형리들로부터 동생 현석문(玄錫文)님과
 함께 혹형을 당하였으나 모두 참아 냈다.
옥중에서 동생에게 신망애(信望愛) 삼덕에 관한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을 감동시켰다. 12월 29일 현경련은 6명의 교우와 함께 4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시었다.
 
*현경련 베네딕타님의
동생 현석문 가를로님은 누나의 6년 뒤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심

 

 

 

 

 

정정혜 엘리사벳
 
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12.29
 
 


동정 순교자인 정정혜님은 정약종(丁若鍾)의 딸로, 네 살 때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전가족이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丁哲祥)은 순교하였으나
 
정정혜님은 어머니 유 체칠리아, 오빠 정하상(丁夏祥)남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 뒤 마재의 삼촌 정약용(丁若鏞)의 집에서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친척들의 구박과 냉대를 아름다운 덕행과 인내로 극복하고,
박대하던 몇몇 친척들까지 입교시켰다.
 
1839년 7월 11일 기해박해 때 정정혜는 서울에서 어머니,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면서 320대의 곤장을 맞았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에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3세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시었다.
*정정혜님의 어머니 유체첼리아님, 오빠 정하상 바오로님 모두 순교하심

 

 

 

 

고순이 바르바라
 
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12.29
 
 


고순이님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고광성(高光晟)님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교우인 박종원(朴宗源)님과 혼인하여 3남매를 두고,
모범 가정이라고 칭찬을 들으며 살았다.
또한 회장인 남편을 도와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며 병약자를 간호하는 등
교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봉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10월 26일 남편이 먼저 체포되고,
그 이튿날 고순이님도 체포됨으로써 포청에서 남편과 만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하였다.
 
형조에서도 남편과 함께 고문을 당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남편과 함께 모든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고순이님은 12월 29일
남편 박종원님보다 한 달 먼저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42세의 나이로 순교하시었다.

 

 

 

 

이영덕 막달레나
 
성지 서소문 밖 순교일 1839.12.29
 
 


동정 순교자인 이영덕님은 외교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외할머니의 권면으로 신앙을 갖게 되었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과 혼인할 것을 강요하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는 꾀병을 앓기도 하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써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완고한 어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게
가출할 수 있도록 청원하였다.
그러나 주교가 허락하지 않으므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서 숨어 살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교는 처음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으나, 조선 풍습에 가출했던 부녀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알고는 세 모녀가 살 수 있도록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를 각오하고, 주교가 체포되면 자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자수할 틈도 없이 6월 어느 날 집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살이 끝에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2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시었다.
*이영덕 막달레나님의 동생 이인덕 마리아님은
 언니 한 달 뒤에 당고개에서 22세에 참수로 순교하심


          

 
   


카치니(Giulio Cac

 치니(Giu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