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9월16일(수) 순교자 聖고르넬리오, 聖치프리아노님..등

H-Simon 2009. 9. 15. 11:26

 

 
9월16일(수)
    순교자 聖고르넬리오, 聖치프리아노님..등

                       

                하느님,   

               성인 성녀님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주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저희를,

 

               아버지의 한 없으신 사랑으로 강복해 주옵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리나이다....아멘

 

                              ****         ****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해당 번호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고르넬리오 ** Cornelius 9월 16일 교황,순교자   +253년
2 니니아노 ** Ninian 9월 16일 주교,선교사 칸디다 카사(Candida Casa) +432년?
3 성녀 둘치시마 Dulcissima 9월 16일 동정 순교자 수트리(Sutri) +연대미상
4 로젤로 Rogellus 9월 16일 순교자   +852년
5 성녀 루드밀라 ** Ludmila 9월 16일 순교자 보헤미아(Bohemia) 860-921년
6 성녀 루치아 Lucy 9월 16일 부인,순교자   +300년
7 마르치아노 ** Marcian 9월 16일 원로원 의원,순교자   +304년경
8 복자 빅토르 3세 ** Victor III 9월 16일 교황   1027-1087년
9 성녀 세바스티아나 Sebastiana 9월 16일 바오로의 제자,순교자   +1세기경
10 아분단시오 ☞7 Abundantius 9월 16일 부제,순교자   +304년경
11 아분디오☞7 Abundius 9월 16일 신부,순교자   +304년경
12 성녀 에디타 Edith 9월 16일 공주,수녀 윌튼(Wilton) 961-984년
13 성녀 에우페미아 ** Euphemia 9월 16일 동정 순교자   +307년?
14 요한 ☞7 John 9월 16일 소년,순교자   +304년경
15 제미니아노 Geminian 9월 16일 순교자   +300년
16 치프리아노 ** Cyprian 9월 16일 주교,교부,순교자 카르타고(Carthago) 200/210?-258년
총 16 성인

 

 

    ▶고르넬리오(9.16)
 
성인명 고르넬리오(Cornelius)
축일 9월 1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교황,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253년
같은이름 고르넬리우스, 꼬르넬리오, 꼬르넬리우스, 코르넬리오, 코르넬리우스

            


   로마의 사제이던 성 코르넬리우스는 성 파비아누스의 순교 이후 거의 14년 동안이나
지연되어 오던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는 영광을 얻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교황 선출이 지연된 것은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문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이룬 주요 업적은 박해 동안에 배교를 선언했던 신자들과의 화해 정책이다.
그는 배교자들의 합당한 통회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단죄한 반면, 배교를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단죄하고, 교회가 그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던
노바티아누스 일파를 공격하던 카르타고의 주교 성 키프리아누스를 끝까지 옹호하였다.
한편 그는 배교자를 용서하는 권한이 교회에는 없을 뿐더러, 이제 자신이 교황이라고 선언했던
로마의 사제 노바티아누스와 그를 정점으로 모인 엄격파들을 단죄하여 교회의 평온을 회복하였다.
노바티아누스는 첫 번째 대립 교황이었다.

   노바티아누스의 극단주의를 옹호하는 무리들은 재차 힘을 규합하였고, 동방에서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코르넬리우스는 교회가 통회하는 배교자들을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재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코르넬리우스의 제의로 251년 10월에 개최된 서방 주교들의 시노드는
노바티아누스 일파의 가르침을 단죄하고, 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

   황제 갈루스가 253년에 또 다시 그리스도교 박해를 재개하자, 그는 첸툼첼레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순교자로서 삶을 마감하였다.

 
 
 
 
 
    ▶니니아노(9.16)
 
성인명 니니아노(Ninian)
축일 9월 1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선교사
활동지역 칸디다 카사(Candida Casa)
활동연도 +432년?
같은이름 니니아, 니니아누스, 니니안, 닌니드

 


   니니안, 니니아 혹은 닌니드 등으로 불리는 성 니니아누스는 성 베다(Beda, 5월 25일) 시대의
사람이다. 성 아일레드가 기술한 성 니니아누스의 생애에 의하면,
그는 컴브리아 지방 브리턴인의 어느 개종자의 아들로서 로마에서 공부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다시 칸디다 카사의 주교가 되어 고향 영국의 선교사로 돌아온 그는 참으로 열렬하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투르의 성 마르티누스 수도원에서 대리석을 가져다가 초석을 놓고
성당을 세웠는데, 이것이 ‘화이트 하우스’로 널리 알려졌고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와 그의 수도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인근의 브리턴인들과 발렌시아의 픽트인들이 개종하였다.
 
 
 
 
 
   ▶루드밀라(9.16)
 
성인명 루드밀라(Ludmila)
축일 9월 16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보헤미아(Bohemia)
활동연도 860-921년
같은이름 루트밀라

 

순교자 루트밀라


   성녀 루드밀라는 슬라브 왕자의 딸로 태어나 보헤미아의 공작 보리보이와 결혼하였는데,
남편도 자신이 다니던 성당의 성 메토디우스(Methodius, 2월 14일)로부터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보헤미아에 첫 번째 성당을 세웠다.
그러나 왕가에서는 이 신흥종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반대하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남편마저 운명하였다. 그녀는 덕스럽고 배움이 많은 부인이었다.
그녀는 늘 주민들을 돕고 있었기에 백성들은 그녀의 높은 덕을 늘 칭송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싫어하던 왕가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체코에서 더 많은 공경을 받고 있다.
 
 
 
 
 
   ▶마르치아노(9.16)
 
성인명 마르치아노(Marcian)
축일 9월 1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원로원 의원,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304년경
같은이름 마르시안, 마르치아누스, 마르치안, 마르키아노, 마르키아누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사제인 성 아분디우스와 부제인 성 아분단티우스는
로마의 플라미니아 가도에서 순교했는데, 헤라클레스를 숭배하라는 명을 받고 거절하자
칼로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유해는 1583년 예수 성명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성 아분디우스가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 로마의 원로원 의원인 성 마르키아누스가
방금 죽은 아들 성 요한을 안고 비통에 잠겨 지나가고 있었다.
성 아분디우스가 성 요한을 위해 기도하자 그 소년은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성 마르키아누스와 성 요한은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함께 순교하였다.
 

☞ < 10, 11, 14 > 번....함께 참조할 내용입니다.

 
 
 
 
 
    ▶빅토르 3세(9.16)
 
성인명 빅토르 3세(Victor III)
축일 9월 16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교황
활동지역  
활동연도 1027-1087년
같은이름 빅또르, 빅똘, 빅톨

 


   이탈리아 베네벤토의 란돌포 5세 왕자의 아들로 태어난 다우테리우스는 억지로 결혼을 시키려는
부친의 뜻을 늘 반대하며 지내던 중, 부친이 1047년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은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그를 강제로 집으로 끌고 갔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집에서 지내는 척 하다가
일 년 뒤에 다시 집을 뛰쳐나왔다. 그는 가족들이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일부로 고향 마을에 있는
성 소피아 수도원에 살면서 이름을 데시데리우스라고 개명하였다.

   그 후 그는 이곳저곳을 돌아 다니면서 방랑생활을 하였고, 살레르노에서는 의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1053년에는 교황 레오 9세를 도와서 노르만족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하였고, 다음 해에는
빅토르 2세의 궁에서 활동하였다. 1054년 그는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원장, 교황청 대사 등을 역임했는데, 1058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뒤에도 몬테카시노의
원장으로 계속 머물러 있었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재건하고, 유럽의 학문과 문화의 전당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건축물과 예술 그리고 수도원의 규칙 등으로 특히 유명한 수도원이 되게 하였다.
그는 빅토르 3세란 이름으로 그레고리우스교황을 계승하여 1086년 5월 24일에 착좌할 수 있었지만,
황제 측의 농간으로 1087년 5월 9일까지 착좌하지 못 하였다. 이때의 대립교황은 클레멘스 3세였다.
그는 불과 만 4개월 동안 교황직에 있었다. 그는 1887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치프리아노(9.16)
 
성인명 치프리아노(Cyprian)
축일 9월 1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교부, 순교자
활동지역 카르타고(Carthago)
활동연도 200/210?-258년
같은이름 치쁘리아노, 치쁘리아누스, 치프리아누스, 치프리안, 키프리아노, 키프리아누스, 키프리안

 


   200-210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유복한 이교 가정에서 내어난
성 타스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는 수사학자이자 법률가였고 또 교사였다.
그는 246년경 속세의 불의와 부패에 회의와 실망을 느끼던 중 하느님의 은총으로
노사제인 코일리키우스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즉시 당대의 저명한 성서학자이자 유명한 저술가가 되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 후
그는사제품을 받았고, 249년 초에 카르타고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249년에 일어난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피신하였으나,
은밀히 피신처에서 편지 등을 보내는 방법으로 자기 교구를 계속 지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피신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251년에 교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많은 교구민들이 박해 동안에 배교하였고, 또 자신의 주교 선임을 반대하던
사제 노바티아누스가 이단에 빠져 있음을 알았다. 노바티아누스 신부는 배교한 신자들에게
아무런 회개 행위도 요구하지 않고 교회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지나친 관대함을 나무라고, 박해 당시 배교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규율이준수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죽을 위험에 처한 배교자를 제외하고는
새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배교자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유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251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된 성 코르넬리우스(Cornelius, 9월 16일)가 배교자들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 노바티아누스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바꾸어 배교자들은 영원히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는 배타적인 엄격주의자로 돌변하였다.
로마의 주교로 선출될 것을 기대했던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고
대립교황으로 등장하며 이교적인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즈음에 성 키프리아누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가톨릭 교회 일치"(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와 "배교자들에 관하여"(De lapsis)를 저술,
배포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오류에 빠지지 않고 교회 안에 일치를 이루도록 촉구하였다.

   배교자 문제가 해결된 지 얼아 안 되는 252-254년 사이에 아프리카 지역에 몸서리치는 흑사병이
창궐하였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온갖 수단을 강구하여 이를 물리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를 반대하는 이들과 신자들은 흑사병을 그리스도교와 성 키프리아누스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며
박해의 빌미로 삼았다. 즉 그리스도교 신자들 때문에 하늘이 분노하여 전염병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사람들의 낭설을 반박하고 위로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데메트리아누스에게"(Ad Demetrianum)과
"죽음에 대하여"(De mortalitate)라는 책을 썼다.

   그 후 얼마 뒤에 그와 아프리카의 다른 주교들은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 8월 2일)와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황은 이단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이 베푼 세례도 유효하다고 인정한 반면, 그들은 이를
극구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255년 성 키프리아누스는 지역 주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카르타고에서 주교회의를 열고 이단자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재세례를 요구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성 키프리아누스는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당시 로마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또 모든 주교와 사제와 부제들이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 예식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지방 총독인 파테르누스에 의하여
카르타고에서 50마일 거리에 있는 쿠루비스로 유배되었다. 또 다음해에는 모든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다. 성 키프리아누스는 새 총독인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소환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끝까지 이교의 신에게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여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됨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는 교회, 사목, 성서, 성사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관하여 박해와 어려운 상황에서도 13편의 저서와
65편의 서간들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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