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7월6일(月) 聖女 마리아 고레티 童貞순교자님..등

H-Simon 2009. 7. 6. 09:21

 

7월6일(月) 聖女 마리아 고레티 童貞순교자님..등 

 

                     

                                                            

             하느님,  성인 성녀님들의 기도와 공로에 힘입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려는 저희를,

             사랑과 평화로 강복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리옵나아다....아멘

                                             ****     ****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성녀 고델리바 ** Godeliva 7월 6일 순교자   1045-1070년
2 고아르 Goar 7월 6일 신부,은수자 아키텐(Aquitaine) +575년
3 성녀 도미니카 Dominica 7월 6일 동정 순교자 캄파니아(Campania) +303년?
4 둘치시모 Dulcissimus 7월 6일 순교자   +90년경
5 로물로 Romulus 7월 6일 베드로의 제자,주교,순교자 피에졸레(Fiesole) +90년경
6 성녀 루치아 Lucy 7월 6일 순교자   +연대미상
7 릭시오 바로 Rixius Varus 7월 6일 순교자   +연대미상
8 성녀 마리아 고레티** Mary Goretti 7월 6일 동정 순교자   1890-1902년
9 성녀 섹스부르가 Sexburga 7월 6일 과부,수녀원장 엘리(Ely) +699년경
10 시조에스 ** Sisoes 7월 6일 은수자 이집트(Egypt) +429년경
11 이사야 ** Isaiah 7월 6일 구약인물,예언자,순교자   +8세기BC
12 카리시모 Carissimus 7월 6일 순교자   +90년경
13 크레센시오 Crescentius 7월 6일 순교자   +90년경
14 복자 토마스 알필드 Thomas Alfield 7월 6일 순교자   +1585년
15 트란퀼리노 Tranquillinus 7월 6일 신부,순교자 로마(Roma) +286년
총 15 성인
 
 
 
   고델리바(7.6)
 
성인명 고델리바(Godeliva)
축일 7월 6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045-1070년
같은이름 고델레바, 고들레바

   Donor with St Nicholas and his Wife with St Godelina


   성녀 고델리바는 아무런 죄 없이 고난 받는 자의 상징이자,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순교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는 18세 때에 플랑드르의
귀족인 베르툴푸스와 결혼하였는데, 남편은 별다른 이유 없이 그녀를 멀리하고, 터무니없는 모욕을 주곤 하였다. 그녀의 부친과 그 지방 주교의 압력에 굴복한
남편이 아내에게 돌아왔으나 태도는 전과 같았다.
 남편은 출타하면서 다른 이를 시켜 아내를 살해하고는 자연사를
가장하라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남편은 유죄판결을 모면하였다.
그녀의 사후, 남편은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고 베르쥬-생-위녹 수도원에서
여생을 눈물로 지내다 죽었다.

   고델리바가 죽으면서부터 남편 베르툴푸스는 회개하였는데,
그의 맹인 딸이 고델리바에게 기도하여 시력을 회복한 기적은 그 당시의
사회를 크게 감동시켰다.
1084년 그녀의 유해가 성당에 모셔지자마자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는데,
순례자들은 그곳에 있는 그녀의 우물의 물을 먹으면
치유의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고델리바가 순교자로 공경을 받는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마리아 고레티(7.6)
 
성인명 마리아 고레티(Mary Goretti)
축일 7월 6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890-1902년
같은이름 고레띠, 고레티, 메리, 미리암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이탈리아 안코나의 코리날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는데 6남매 중의 맏이였다. 1896년 그녀의 집안은 갈리아노 교외의
콜레 지안투르코로, 그 다음에는 페리에레 디 콘카로 이사하였다.
이곳에 정착한 직후에 부친은 말라리아에 걸려 운명하니, 남은 식구들은
생계를 위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리아는 상냥하고 침착하였고 또 예의바른 아이였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기도, 순명 및 죄악에 대한 예민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12살이 되지 않은 나이였으나 꽤 성숙한 편이었다.

   1902년 5월 29일 그녀는 첫 영성체를 하였으며 그해 7월 어느 날 오후,
날도 그녀는 집안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이웃에 사는 알렉산데르란
청년이 자기 셔츠를 기워달라는 부탁을 하여, 그것을 손질하면서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이때 18세 된 알렉산데르가 올라와서 계획대로 문을 잠그고,
미리 준비한 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그녀를 끌고 침실로 가려고 하였다. 그녀는 소리치며 완강히 버티었다. 그녀가 끝까지 항거하자
그는 이성을 잃고 마리아의 가슴을 마구 찔렀다.
그녀의 몸에는 14군데의 깊은 상처가 생겼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약 24시간 후에 운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사제가 성체를 영해주면서 알렉산데르를 용서하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저 역시 그를
용서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천국에서 기도할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처럼 그를 천국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정결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한 것이다.
그녀는 195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시조에스(7.6)
 
성인명 시조에스(Sisoes)
축일 7월 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이집트(Egypt)
활동연도 +429년경
같은이름 시소에스


   성 안토니우스(1월 17일) 이후 이집트 사막에 살던 은수자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성인이 곧 시조에스이다. 이집트 태생인 그는 젊어서 세상을 등지고 스케티스사막으로 은거하였다. 나일 강과 거의 인접한 지역까지 들어가서
성 안토니우스가 서거하신 산 속에 은신하였다.
그는 여기서 저 위대한 선배 은수자의 큰 덕을 본받으려는 일념으로 끝까지
항구하여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는 늘 안토니우스 성인이 자신에게
말씀하시고 지도하시는 듯 현장감 있는 생활을 하였던 만큼 그의 엄격한
보속행위, 철저한 침묵 그리고 열렬한 기도 정신은 인근 은둔소에 널리 알려졌다.

   악습을 이기려는 그의 노력은 처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과오를
저지르면 꾸짖거나 타이르지 않고 인내와 온화함으로써 대하여 큰 감명을
주곤 하였다.
한번은 어느 은수자가 그를 찾아와서 "스승님, 저는 주님 면전에
있기를 항상 소원하고 있습니다." 하고 입을 열자, 그는 "모든 창조물 앞에
겸허하게 엎드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오. 그것도 아주 겸손하게…"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는 임종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보라, 저기 우리 주님께서
내게로 오시다니!"
그는 성 안토니우스 산에서 적어도 62년간을 은수하다가 429년경에 선종하였다.
 
 
 
   ▶이사야(7.6)
 
성인명 이사야(Isaiah)
축일 7월 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구약인물, 예언자,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8세기BC
같은이름 이사이야

 


   "야(훼님)는 구원"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성 이사야(Isaias)는
기원전 760년경 아모스라는 사라의 아들로 태어났다(이사 1,1).
이밖에 그의 가족이나 출신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문체나 언어 기법, 도시인들이 즐겨 쓰는 은유,
또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 때문에 그를 이 도성 출신으로 추론할
수 있다.
임금이 궁궐 밖으로 시찰 나갔을 때 그가 어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었음으로
보아(7,3), 귀족이었다는 추측이 강하게 제기된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이사야가 귀족처럼 왕궁을 수시로 드나들 수 없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또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소명 환시를 근거로 이사야가 사제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6장의 배경은 성전 안팎이 다 될 수 있다.
6장의 환시를 보기 위해서 이사야가 굳이 사제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격조 높은 문체를 구사하고 강력한 웅변력을 발휘하는 이사야가 평범한 집안 
이상의 출신으로 고급 교육까지 받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기에 이사야가 임금이나 조정과 논쟁을 벌이고 그들의 종교, 정치,
사회 정책을 논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출신은 신학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 이사야에게는 아모스나 호세아처럼 ‘광야 전통’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는 이집트 탈출 등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알지만 별다르게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그가 시나이 계약과 함께 선택된 민족의 양 기둥을
이루는 다윗 계약(2사무 7장)을 강조하는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왕실과 가까운
계층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사생활은 그의 사명 수행과 관련된 사항만 몇 가지 간략히 제시된다. 그는 ‘여예언자’와 혼인하는데 두 아들에게 모두 상징적 이름을
붙인다(7,3; 8,3). 자식들의 이름까지 동원하여 자기의 메시지를 가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8,18).
이렇듯 이사야는 혼인과 가정 생활까지 통틀어 온몸으로 하느님 말씀
선포의 사명을 수행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찌야 왕이 죽던 해”(기원전 740년)에 소명을 받고(6,1)
그 뒤 세 임금의 치하에서 활동한다(1,1). 그에 대한 마지막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기원전 701년이다.
로마 순교록에는 이사야가 므나쎄 왕 시기(기원전 687-642)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그를 순교자로 여기며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예언자가 순교했다는 전통은 성서에 언급된 것이 아니며
분명히 외경에 속한다(이사야의 승천; 에녹 11,37).
이사야서의 머리글(1,1)에 따르면 이사야가 박해자 므나쎄 왕 시기에는
살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므나쎄 왕은 온갖 외국 종교 관습을 끌어들였고, 야훼 신앙을 따르는 자들을 심하게 박해하였다.
바로 이 점에 근거하여 이사야가 순교했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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