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7월5일(日) 한국聖職者들의 수호자聖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 대축일

H-Simon 2009. 7. 4. 16:33

 

7월5일(日)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聖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 대축일  

 

    

                                                            

             하느님,  성인 성녀님들의 기도와 공로에 힘입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려는 저희를,

             사랑과 평화로 강복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리옵나아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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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김대건 안드레아** 金大建 Andrew 7월 5일 신부,순교자 한국(Korea) 1821-1846년
2 누메리아노  Numerian 7월 5일 주교 트리어(Trier) +666년
3 도미시오 Domitius 7월 5일 순교자 프리지아(Phrygia) +362년
4 마리노 Marinus 7월 5일 순교자   +연대미상
5 성녀 모드벤나  Modwenna 7월 5일 은수자 폴스워스(Polesworth) +900년
6 성녀 모드벤나 Modwenna 7월 5일 동정녀 휘트비(Whitby) +695년경
7 성녀 세도파 Sedopha 7월 5일 순교자   +연대미상
8 아가토 Agatho 7월 5일 순교자   +306년
9 아타나시오 ** Athanasius 7월 5일 은수자,수도원장 아토스산(Mount Athos) 920-1000/1003년?
10 아타나시오 Athanasius 7월 5일 부제,순교자 예루살렘(Jerusalem) +462년
11 안토니오 마리아 즈가리야 ** Anthony Mary Zachary 7월 5일 신부,설립자   1502-1539년
12 성녀 조아 Zoa 7월 5일 순교자 로마(Roma) +286년경
13 성녀 치릴라 Cyrilla 7월 5일 순교자   +300년
14 테오도토 Theodotus 7월 5일 순교자   +연대미상
15 성녀 트리피나 Triphina 7월 5일 순교자   +306년
16 성녀 필로메나 Philomena 7월 5일 동정녀 산 세베리노(San Severino) +500년
총 16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7.5)
 
성인명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w)
축일 7월 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21-1846년
같은이름 김 안드레아, 김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聖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1814년 순교)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상해로부터 20리가량 떨어진 김가항(金家港)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고, 그곳의 만당(萬堂)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드림으로써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솔 뫼   생 가
 
 
 
 
    ▶아타나시오(7.5)
 
성인명 아타나시오(Athanasius)
축일 7월 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은수자, 수도원장
활동지역 아토스산(Mount Athos)
활동연도 920-1000/1003년?
같은이름 아따나시오, 아따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

 


   성 아타나시우스(또는 아타나시오)는 920년 흑해의 남동부 해안 지역에 있는
트라브존에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콘스탄티노플에서 수학하였다.
세례명은 아브라함이었고, 키미나스 산에서 니케포루스 2세 황제의 삼촌인
말레이노스 수도원 원장 문하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한편 니케포루스 2세는
장군 시절에 아브라함을 자신의 영적 지도자로 삼았었다.
그 후 아타나시우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가 머물던 키미나스 산의 수도원은 소위 라브라로 불리는데, 이 말은
은수자들이 성당을 중심으로 개별적인 삶을 사는 은수자들의 집단을 뜻한다.
그는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자 이를 피하여 은수자로 살기 위해서 그리스의
 아토스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리스 동남쪽 크레타 섬에서 사라센과
전쟁이 벌어지자 니케포루스 장군과 동행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이 일을 성공리에 마친 아타나시우스는 아토스 산으로 다시 돌아가서,
황제가 된 니케포루스 2세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936년 아토스 산에
대수도원를 세웠다.

   그는 체계화된 공동체 삶의 형태로 은둔적인 수도생활을 새롭게
확립하였다. 그러나 느슨한 체제의 수도원들에 거주하던 많은 아토스 산의
 수도자들은 이러한 개혁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반대는 969년 황제가 죽은 뒤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났고,
더욱이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던 새 황제 요한 1세마저도 키프로스로
떠나버렸다. 공주 생활 수도원이라는 개혁에 반대하는 이들이 콘스탄티노플로
황제를 찾아가 아타나시우스를 고발하자, 황제는 수도자 에우티미우스를
파견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아타나시우스의 개혁이 공적으로 인정되어
재정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수도 규칙과 수도 생활 방법 또한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이에 용기를 얻어 아토스 산으로 돌아온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이
만든 58개 공동체의 원장이 되었다.

   수천 명의 수도자들이 오늘날에도 그곳에서 생활하고 기도한다. 물론
지금은 동방 정교회 수도원의 중심으로 로마와의 교류가 없다.
공주 생활 수도원의 창설자인 성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다섯 동료 은수자들은
수도원의 건물이 붕괴되면서 사망했다고도 하고 살해당했다고도 한다.
 
 
 
 
 
 ▶안토니오 마리아 즈가리야(7.5)
 
성인명 안토니오 마리아 즈가리야(Anthony Mary Zachary)
축일 7월 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502-1539년
같은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자카리아, 자카리아스, 자카리야, 재커리, 즈가리아, 즈카르야

           


   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자카리아(또는 안토니오 마리아 즈가리야)1502년 말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 크레모나의 귀족 가문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안토니에타에게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일찍이 정결을 지키겠다는 서약과 함께 자신에게 남겨진 유산을 포기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고 청빈을 사랑했다. 1522년 파도바의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로 활동하던 중 자신의 소명이 영혼의 병자를 치료하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신학을 배운 뒤 1528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0년 밀라노 과스탈라의 토렐리 백작 부인의 지도 신부가 된 그는
‘영원한 지혜의 형제회’에 합류하였고, 그곳에서 밀라노 귀족 출신인 페라리와
모리쟈를 만나 그들과 함께 성 바오로를 주보성인으로 하는 성직 수도회를
설립했다. 이것이 ‘바르나바회’라고도 불리는 ‘성 바오로 성직 수도회’이다.
이 수도회의 목적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쇄신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여자 수도회인 ‘성 바오로의 천사 수녀회’도 설립하였다.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1539년 과스탈라에서 병에 걸려 크레모나에 
있는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그 해 7월 5일 29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1849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897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안토니우스 성인은
이탈리아의 아버지요 수호성인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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