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시기

범계성당 사순특강 -수난과 부활- ◆제 1 편◆ 강사: 윤인복

H-Simon 2012. 3. 6. 19:30

 

-20012년 3월 4일, 11일.(일요일: 13:30분)-범계성당 대성전-

 

◆제 1 편◆

        

 

  

 

성화(聖畵)를 통해서 보는 신앙 이야기

-강의록: 수난과 부활-

                                                                                                                 강사: 윤 인 복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무한한 것. 헤아릴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기도" 726-730년)

 

    

 

 

◇사진을 크릭  하시면 크게 원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한 그림은 12제자중 예수를배반 할자가 있다는 사실을 예고한 것이다.

피렌체에 소재한 성 마르코 성당 소속 수도원식당 벽을 위해...

 

-창 밖: 레몬 나무와 종려수 나무가 서 있고,

-하늘을 평화롭게 나는 새: "닫혀진 정원  hortus   conclusus",  천상의 낙원을 연상.

 

-공 작: 공작의 고기가 썪지 않는다는 전설로 영원한 생명의 상징을 가진다.  또한 공작은 낙원의 새라는 의미를 지닌다.  공작과 정원은 최후의 만찬 이후, 예수가 처형되더라도 다시 부활하 여 천상의 낙원에서 영원히 산다는 내용의 의미.

-식탁에 늘어선 제자들 후광이 그려져 있으나 식탁 맞은편에 딱 한사람, 유다만이 후광이 없으며,

  맞은 편에 홀로 앉아 있다. 

-유다 열에 고양이: 사악함을 상징.

 

 

   

            무어인로도비코 주문/

수도원의 식당에그려져 있다.- 래오나르도는 모든 인물을 앞  평면에 위치 시키고 세 명씩 무리 지어 구분, 배경은 원근법을 이용해 인물들 뒤로 깊이 물러나도록 하였다.

 

그리스도가 사도들 중 한 명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가장 극적인 순간에 제자들의 얼굴에 분노, 체념, 고통, 충격, 당황, 공포 등의 모든 종류의 감정이 포출된다. 개인의심리를 강조

사도들 각자가 독특한 반응을 보인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조용한 시'라고 말한 바 있는데 회화의 한계를 인식한 그는 새롭고 독특하며

약간은 불경스럽기도 한 방법을 주저없이 채택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실제로 살아있는 모델을 묘

하기 위해 거리에서 일반인들에게 멈춰 서도록 요구한다든가, 웅변가와 설교자가 말을 강조

하기 위해 하는 몸짓을 관찰하였으며, 농아들의 수화를 면밀히 연구하기도 했다.

 

창문 빛을 통해 몸바르디아 지방 풍경을 볼 수 있다. 관람자의 왼쪽 벽에 비추는 식당 안에 빛을

연결. 그린의 오른쪽은 빛을 충분히 받고 있는 반면 왼쪽은 어둡다.  

 

  

  

 

놀데는 "최후의 만찬"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 죽음을 감수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이야기하는 예수를 표현하고 있다.

놀데에게 성찬 의식은 유다의 배반에 대한 예고보다 더 중요하다.

 

예수를 화면의 중심에 위치:  열두 제자가 예수의 주위를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어 예수와 제자의 심리적인 유대감을 강조(동료의 어깨에 서로 손을 얹고 있다.) →유대감가 동료애를 끈끈하게 교환.

 

다듬어지지 않은 형태와 거칠고 투박한 원색의 수누성으로 예수가 가장 낮은 곳으로,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왔음을 강조

 

▶ 원시성 : 놀데는 원시성으로 강렬하고 순수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놀데의 "최후의 만찬"은 종교적 주제와 현대미술의 성공적인 결합의 실례 :

현대미술은 종교의 감동을 펴현하기에는 알맞지 않다는 일반인의 인식을 볼식시키고 신비한 종교적 체험이 가슴 깊숙

곳에서 우러나오는 종교화를 완성했다. 놀데는 외곡된 형태와 강렬한 원색으로 분노. 고통. 기쁨과 슬픔 등의 통렬한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표현주의 기법으로 종교를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겟세마니의 올리브 산에서 예수를 넘기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 가셨다. 예수님께서 재자들과 함께 여러번 거기에 모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함께, 서석 사제들롸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쎄 서 있었다. 예수니께서 "나다." 하실때, 그들은 됫걸음 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예수니께서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는 "아버지

      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 은 " 말코스였다.

     그러자 예수니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셨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수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군대와 그 대장과 유다인들의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집아 결박하였다. (요한 18, 1-12)

 

 

  

 

 

  

그림에 재현된 사건이 발생한 곳은 갯세마니 동산이다. 숨이 막힐 정도로 예수님은 병사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인 채 무기력하게 끌려가고 있다. 밧줄에 손과 목, 그리고 뭄통이 포박된 예수의 알굴과 벗은 발에서는 이미 피땀이 흐른다.

앞으로 예수가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한 예고라 할 수 있다. 그림에 왼쪽 귀퉁이에는 색상의 전통에 따라 노란색 옷을 입힌 유다는 이미 입맞춤으로 예수를 팔아 넘기도 받은 은전 30닢의 돈 주머니를 쥐고 도망치고 있다.

 

베드로: 칼을 빼서 휘두르다가 대사제의 종이 말코스의 오른쪽 귀를 자르고 있다. 예수께서는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집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 52)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마자막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의 손짓으로 말코스의 귀를 고쳐 주신다.

 

오직 복음사가 중 요한만이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라고 전한다.

(요한 18, 10)

 

다른 제자들은 묘사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모두 줄행랑을 친 것일지도 모른다. 예수가 제자들을 보내달라고 했다지만 모두 도망치고 만 것이다.

 

예수를 잡으러 온 병사들은 강도를 잡으러 온 듯 칼과 창, 가시달린 몽둥이 등으로 중무장한 모습이고, 그들의 얼굴은 우둔함으로 바보스럽기 까지 하다. 서로 뒤엉켜 예수만을 향해 돌격하는 모습이 거의 폭동에 가까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으나, 한편으론 그들의 비현실적인 얼굴 표정에선 마치 바보들의 행군같기도 하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양식과는 매우 다른 복유럽풍의 요소라 볼 수 있다.

        

 

 

 

유다가 예수를   팔면서 자신이 입맞춤하는 사람이 예수라는 것을 병사들에게 알려주는 장면이다.

 

예수가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 하던 중 들이닥친 한 무리의 성전 경비병들에게 예수는 아무런 반항의 기색도 보이지 않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기도하고 있다. 슬픔으로 가득한 예수의 얼굴에 유다는 거의 찡그린 얼굴 표정으로 그의 입을 예수에게 들 이대고 있다.

 

그림의 왼쪽에는 갑자기 들이 닥친 병사들에 놀란 제자 한명이 스승이

체포되자 어디론가 놀라 달음 박질 치고 있다. 오른쪽에 성전경비병들

사이에 한 사나이는 예수의 얼굴을 잘 보기 위해 램프를 들고 서 있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얼굴을 이 남자로 나타내어 성서 이야기 속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불빛을 들이대면서까지 예수를

알아보기 위한 호기심 어린 눈빛은 앞으로 예수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 하는 듯하다.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며.......

 

빌라도가 세 버째로 그들에게,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루카 22, 22)

 

 

 

 

  카라바조가 나폴리에 산 도메니코 마조레 성당의 제단을 위해 그린 것이다.

   예수가 기둥에 묶인 채 세 명의 사람에게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다,..      

  기둥에 묶인 예수의 뭄은 채찍의 아픔을 말하듯이 몹시 비틀려 있고,

어둠속에서 예수의 상체에 강렬하게 내리 비추는 빛은 고통 정도를 더욱

  극대화 시키고 있다,                                                              

   예수를 둘러싼 세 명의 고문자들의 모습은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는 분의기

   속에서 고문을 즐기 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한 리듬 감이 보이는 몸동작들이다.

  이미 기둥에는 예수의 땀과 피가 배어 흐르고 있다..  

 

 

 

 

 

 

 

 

예수님을 지키던 사람들은 그분을 매질하여 조롱하였다. 

또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알아맞혀 보아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이 밖에도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많이 퍼부었다.

(루카 22, 63-65)

 

예수는 중앙을바라보며 무릎을 끓고 기둥에 맥없이 구부러져 매달려 있다.

무뤂을 꿇은 한 어린 아이가 두 손을 꼭 모으고 깊은 깊을 슬픔에 잠겨있다. 바로 옆의 수호 천사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형상과도 같은 이 아이를 고통스런 예수에게 인도하고 있다.

벨라스케스는 순수한 어린 아이를 등장시킴으로써 예수가 무죄하게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그때에 총독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서 그분 둘래에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흥색 외투를 입혔다.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끓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하며 조롱하였다.

또 그분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

(마태 27, 27-30)

 

 

 

 

 

 

 

17세기 플랑드르의 유명한 화가인 반 데이크는 유럽 귀족층의 초상화와 종교적.신화적 주제를 많이 그리며 동판화를 제작한다.  

 

이 작품은 그의 종교화 중 하나로 예수가 조롱당하는 장면이다. 갑옷을 입은 무장한 병사는 예수의 머리에 가시나무로 엮은 관을 씌우고 있고, 앞에서는 웃통을 벗은 남자가 예수의 손에 갈대를 꽃고 있다.

그리고 빨간색 옷을 입은 사람은 무엇인가 중얼대고 있는듯하고 나머지 다른 한 사람 역시 공격적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왼쪽에서는 개마져 예수에게 으르렁대고 있다.

이미 예수를 옭아맸던 밧줄에는 선혈이 가득하고 벗겨진 발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다. 모든 표현들은 예수를 고독하게 강조하고 있다.

 

 

 

 

 

 

 

             ◆예수니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하고 말하였다. (요한 19, 5)

 

 

 

 

 

 

<고통받은 자>, 즉 '가여운 자의 초상'이라는 의미의 그림은 예수가 채찍질 이후  당한 고통스런 모욕과 처형을  절차에 따라 화폭에 재현한 것을 일컫는다.그리수도는 45도 정도 돌려 기울어진 얼굴을 감상자 쪽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상처를 펼쳐 보이고 있다.

우리는 회면 전체에 수난의 모든 절차를 표현한 이미지들을 통해 예수가 겪은 고통을 묵상할 수 있다.

 

힘겹게 서 있는 예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 있고, 양손과 발에는 못 박혔던 자국이 보인다. 예수의 옆구리에는 로마군이 예수의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위해 찌른 상처로 피가 솟구치고 있다.

예수의 뒤에는 세개의 못과 망치, 죽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떼언내고 내리기 위한 집게와 사다리 즉, 십자가 처형 당시 사용되었던 도구들이 늘어서 있다.  오른쪽에는 쓸개즙과 포도주를 적시는데 사용한 헝겊 막대기가 길게 그려져 있고 왼쪽에는 십자가에서 예수의 즉음을 확인하기 위해 옆구리를 찌른 창이 묘사되어 있다.

그림의 왼쪽 아래에서부터 수난의 시작을 의미하는 물건들이 묘사되어 있다.

예수의 오른쪽 다리 바깥쪽부터 은전 30닢. 왼쪽 아래에 십자가 표시가 있는 성작, 반달형 찰과 몽둥이, 횃불과 빗자루, 베드로가 베어버린 말코스의 귀, 다음으로 이어지는 수난, 기둥과 채찍, 예수를 조롱하는 상징으로 수염 난 남자의 엎모습, 주먹과 손가락질하는 형상, 오른쪽 위에는 해로데의 금관과 빌라도의 모자, 한줌의 머리카락더미를 들고 있는 손과 흰색 수건, 비로니카의 수건, 찢어진 흰천.오른쪽 아래에 물동이, 예수의 옷, 예수의 다리 아래 안쪽에는 소금통이 있다.

 

무릎을 꿇은 기부자의 모은 손에서 나오는 두루마리 말은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misere mei deus secundum magnam misericordiam tuam" (tlvus 51, 3)의 부분이 적혀 있다.

이에 답하듯 예수의 입에서는 "나는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그가 회개하고 사는 것을 원하노라    nullomortem pweccatoris sed ut magis conuertatur et uiuat"라는  구절이 나오다.

 

 

 

◆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터'하는 곳으로 나가셨다.

그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타라고 한다. (요한 19, 17)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작품은 비현실적인 풍경이나 상상적인 이상한 동물, 인간의 부도덕한 행동을 묘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평소 보쉬가 그려왔던 스타일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주제는 같다. 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장면이다.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외모는 영혼에 따라 아름답거나 추하게 보인다고 여겨욌다. 추한 외모는 악한 영이 원인인 것이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개념을 완벽히 반영하여 인물 하나하나의 표정에서 선함과 함을 분별할 수 있다. 그림의 왼쪽 구석에는 예수의 십자가를 다신 했던 키레내 사람 시몬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예수와 십자가에 함께 매달렸던 악한 강도가 보이고, 오른쪽 위에는 창백한 얼굴을 한 또 다른 강도로 그는 예수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선한 강도로 남는다. 그리고 화면의 왼쪽 구석에는 베로니카가 눈을 지그시 감고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타난 수건을 펼쳐 보이고 있다. 보쉬의 그림은 매우 기상천외하긴 하지만 도독적인 교훈을 전달하려는 노력이 높아 당대 칸 인기를 얻는다.

 

 

 

 

◆ 십자가에 매달리심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 23)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 15)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 중요하게 여긴 로마인들에게 <십자가 처형>은 매우 불명예스런 사형이었기에

이것을 주제로 한 그림은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십자가 처형> 작품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13-14세기에 프란체스코의 산앙심과 그리스도의 일생과 수난에 대한 신비주

의 문헌이 널리 확산 되면서였다.

일반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주제로 다룬그림들에서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있고, 오른쪽에는 사도 요한이 자리한다. 수많은 화가들이 다양한 표현,  즉  고통을 초월한

예수의 모습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러 우아하기까지 한 작품부터 예수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격정적으로

묘사한 작품들도 있다.

 

안토에로 다 메시나(1430-79년경)는 남부 이탈리아출신으로 15새기 중반 베네치아 미술에 유화기법 및 플랑드르 회화양식을 도입한 화가이다. 선이나 명암보다는 색을 중심으로 형상을 구축하는 기법을 우선으로 하여 베네치아 회화의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작은 작품 속에 화가는 라틴어로 "1474년,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그렸다"라는 서명을 쓴 채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중앙에는 고요하고 창백한 모습에 균형잡힌 그리스도와 그 양 옆에는 나무 기둥에 기죽끈으로 묶인 두 명의 도가 예수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몸의 형태가 뒤틀려 있다.

 

십자가 아래에  해골은 중세인들이 아담이 골고타에 묻혔다는 믿음에서 배롯된 것이다. 아담의 해골은 뱀의 꼬임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시작된 원죄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그 피로 깨끗이 씻겨나간다는 의미이다. 곧 십자가의 수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의 서막인 셈이다.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거의 성모 마리아와 예수가 가장 사랑하였던 사도 요한이 슬퍼하고 있는 모습이등장한다.

 

올빼미는 기만과 어리석은을 상징한다. 그러나 올빼미는 빛을 싫어하는 야행성 동물로 볼 때 진정한 믿음의 빛을 외면하는 유대인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십자가 밑 부분의 뒤에는 밑둥이가 잘린 나무 그루터기에서 새가지가 나오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  죽음으로 인간은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는 것은 의미한다. 옛 계약인 구약의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계약의 신약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마사초의 작품 <삼위일체>에서는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면보다는 기념비적인 장엄미가 흐른다.

그림속에 등장인물들은 실물과 흡사한 크기로 재현되었고,

대형 면적에 엄격한 구성과 고대 조각처럼 조형적으로살아 있는 듯한 입체감은 조토회화에서 볼 수 있다.

그림의 배경은 새로운 개념으로 브루레스기가 개발한 새로운 건축 양식과 과학적 원근법을 완전히 숙지하고 입증해 보였다.

따라서 마사초의 <삼위일체>는 르네상스 회화에 원근법을 가장 먼저 선보인 작품이다.

마사초가 프레스코 작품에원근법을 통해 공간의 깊이를 창조해낸 것은 패널화로 옮겨져 이탈리아 다른 도시에서도 유행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 23)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허려는 것이다.(요한 3, 15)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가 아니라 우리 위에 오르신 것이다. (성 맘브로시오)

 

 

 

 

그뤼네발트는 스트라스브르 근교의 이젠하임에 있는 안토니오 수도회의 의뢰로 소속 수도원 변원을 위해 제작된 것이다.병자들을 간호하는 사목 횔동을 담당한 수도회는 그림을 통해 질병과 고통의 죽음 이길 수 있는 은총을 병자들에게 심어주려는 목적이었다.

황량한 골고타의 언덕에서 행해진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비참한 슬픔으로 재현되어 있다.

말라 비틀린 팔과 다리, 피주성이의 가시관, 못에 박혀 비틀린 두 손의 손가락들, 채찍 자국, 온통 기시가 박힌 몸, 몸의 무개로 찢어질 듯한 겨드랑이, 밑으로 처지고 비늘러진 얼굴 등 예수의 몸은 버리부터 발끝까지 끔찍한 고통을 말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아들의 죽음에 괴로운 얼굴로 사도 요한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지탱하고 있다. 그와는 달이 스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붓고 회개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릅을  꿇고 예수를 바라보고 비탄에 빠져있다.

 

세레자 요한이 등장하고 있다. 세레자 요한은 예수의 죽음에 그다지 놀라지 않는 인상이고, 단지 손가락으로

예수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요한의 옆에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햐 한다."(요한 3: 30)라고

글귀가 쓰여 있다. 그리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 29)라고 하였던 세례자 요한의 아래에 한 마리의 어린 양은 인류의 죄를 위해 희생으로 한 몸을 바친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작품 <십자가 위에 그리스도>는 벨라스케스가 자연주의에 기초한 종교화를 소게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현실적인 모습 그대로 묘사한 것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화려하고 다양한 붓놀림과 미묘한 색의 조화를 이용하여 형태나 질감 그리고 공간과 빛으로 분위기를 내는 효과를 내는 데 탁월한 능렬을 발휘한다.  

 

이 작품에서도 화면 전체가 실재처럼 보이더라도강렬한 명암의 대비 속에서 빛을 이용하여 신성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고 히브리말, 그리스말 그리고 라틴말로 새겨진 명패 아래에는 힘없이 아래로 떨어뜨린 예수의 얼굴이 보인다. 그러나 화가는 조금도 예수의 죽음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십자가 뒤의 어두운 배경은 낮 열두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어둠이 온 땅에 덮인 것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무었보다도 <십자가 위에 그리드도>는 단순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웅장한 구도를 나타내며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화가: 자신이 그린 대상을 바라보며 명상에 작겨

        있다.   

 

십자가상: '살아났다'.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가

        얼굴을 돌려 화가를 바라본다.

 

화가 수르바란은 십자가상을 그리던 도중에 명상에 잠겼고, 그 명상의 이미지 속에서 자기가 그린 십자가 위의 예수와 교감을 나눈것이다.

결국 화가 수르바란이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업을 일종의 종교적 수행으로 해석한 것.

 

 

 

 

▶"제 2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