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3월 15일 聖女루드비카 드 마리약님..등

H-Simon 2011. 3. 14. 21:43

 

 

3월 15일(화)  

聖女루드비카 드 마리약님..등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Ludovica de Marillac)
 
 
  

 

                                                          낙엽처럼 살아온

 

  

    ▶루도비카 드 마리약(3.15)
 
성인명 루도비카 드 마리약(Louise de Marillac)
축일 3월 15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과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591-1660년
같은이름 루도비까, 루이즈, 마리악

 


   1591년 8월 프랑스의 뮤(Meux)에서 태어난 성녀 루도비카(Ludovica)
아기 때에 어머니를 잃었으나 수녀들의 도움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이윽고 그녀는 안토니우스 레 그라(Antonius Le Gras) 백작과 결혼하여
12년 동안 행복한 생활을 한 후 남편과 사별하고 말았다.
 한동안 실의에 빠져있던 그녀에게 뜻하지 않게도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로부터
영적지도를 받는 계기가 생기면서부터 일대 전환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녀는 잘 알고 있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us, 9월 27일)를 찾았다.
그 당시에 성인은 ‘애덕회’를 조직하여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빈첸시오 성인은 성녀 루도비카의 소망을 받아들여
 ‘애덕의 수녀회’를 설립하여 초대원장으로 루도비카를 임명하였다.
 
이 수녀회가
오늘날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라고 불리는 수녀회이다
그때부터 그들의 수도원은 병원이요 성당은 교구의 모든 성당이며
봉쇄 구역은 길거리가 되었다.
회칙 초안도 그녀가 작성하였다.
그녀의 명석한 두뇌와 관대한 사랑은
이 수녀회의 급속한 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1660년 3월 15일 성녀 루도비카가 파리에서 임종할 때
프랑스 내에는 이미 40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병자와 가난한 이를 돕는 구호소는 수없이 많았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봉사하라
.…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말 것이다.
그대가 섬기는 이는 곧 그리스도이시니…”
 
그녀는 1920년 5월 9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4년 3월 1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960년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사회복지사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론지노(3.15)
 
성인명 론지노(Longinus)
축일 3월 1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군인,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세기경
같은이름 론기노, 론기누스, 론지누스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성 론지노(Longinus)


   전설에 의하면 성 론지누스(론지노) 빌라도의 지시를 받고
주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다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백부장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과 함께
지진과 그 밖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하며 몹시 두려워했다는
바로 그 백부장이라 한다.

   그 후 그가 병들어 누웠을 때,
창에 묻은 주님의 피를 자기 눈에 갖다 대자마자 병이 나았음을 보고
군인 생활을 포기한 뒤 사도들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지내다가 박해를 맞았다.
집정관은 그의 이를 뽑고 혀를 잘랐으나,
그의 설교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는 도끼를 들고 이방인들의 신상을 때려 부수면서
“이게 무슨 신들이람!” 하고 외쳤다.
그러자 집정관은 즉석에서 참수하도록 명하였다.
그의 유해는 만투아(Mantua)에 보존되어 있고 성인으로서 공경 받는다.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3.15)
 
성인명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Clement Mary Hofbauer)
축일 3월 1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선교사
활동지역  
활동연도 1751-1820년
같은이름 글레멘스, 끌레멘스, 클레멘쓰, 클레멘트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Clemens Maria Hofbauer)


   체코 동부 모라비아(Moravia)의 타스비츠(Taswitz)에서 1751년 12월 26일 태어난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Clemens Maria Hofbauer)의 본명은
얀 드보락(Jahn Dvorak)인데 독일 이름인 호프바우어로 개명하였다.
 
그는 푸주한인 부모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빵 굽는 기술을 배웠다.
비록 어려운 생활을 하였으나
그는 항상 은수자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얼마 동안은 로마(Roma)와 빈(Wien) 사이를 오가는 방랑생활을 하다가
오스트리아의 브루크(Bruck) 근교 프레몽트레 수도원에서
빵 굽는 일을 하다가 마침내 은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제국의 요제프 2세(Joseph II) 황제가 은수소들을 폐쇄하였을 때,
그는 빈으로 돌아와서 다시 빵 굽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가 친구인 베드로 쿤즈만(Petrus Kunzmann)과 함께 이탈리아
티볼리(Tivoli)의 주교 키아라몬티(Chiaramonti, 후일의 교황 비오 7세)의 승낙을 받고
재차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그 후 빈과 로마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구속주회에 입회하여 1785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파견되었으나,
황제가 많은 수도회를 축출하였기 때문에 구속주회 수도원 건립이
불가능하게 되어 돌아오는 길에 옛 친구인 쿤즈만을 만나 평수사로 입회시켰다.
 그 후 교황대사의 요청에 따라 그들은 폴란드의 바르샤바(Warszawa)로 갔으며,
그곳에서 20여 년 간 선교활동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는 늘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일했으며,
고아원과 학교를 세웠고 독일과 스위스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나폴레옹이 수도회를 탄압할 때 그와 그의 동료 구속주회 회원들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각자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는 끝내 빈에 정착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의 이탈리아 구역에서 일하였으며,
우르술라회의 지도신부로도 활약하면서부터 그의 설교와 성덕 그리고 지혜와
고해신부로서의 이해심 등이 그에게 높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빈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하였고,
독일 지역의 수도생활 재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는
요셉주의자들의 그릇된 사상과 대치하여 힘찬 싸움을 하였다.
그는 1820년 3월 15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1888년 1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09년 5월 20일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14년 빈의 사도이자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