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7월 31일 聖이냐시오 로욜라, 聖젤마노님..등

H-Simon 2010. 7. 30. 20:51

 

 
7월 31일(토)
聖이냐시오 로욜라, 聖젤마노님..등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Ignatius) 

16.jpg
 
 
 
 
 
이냐시오(7.31)
 
성인명 이냐시오(Ignatius)
축일 7월 3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로욜라(Loyola)
활동연도 1491-1556년
같은이름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이니고


   성 이냐시오는 1491년에 에스파냐 기푸스코아 지방의 아스페이티아 읍
위쪽의 로욜라 성에서 아버지 벨트랑 아녜스 데 오네스 이 로욜라와
어머니 마리아 사엔스 데 리코나 이 발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이니고이다.
 
그는 1506년에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에스파냐의 왕실 재무상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의 집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때부터 자신이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명예를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머리와 옷 등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며
허영과 사치를 일삼았다.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후인 1517년에 이냐시오는 군에 입대하였다. 
 
   1521년 나바라의 팜플로나에서 프랑스군과의 교전 중에
다리 부상을 입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성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그를 치료해 주었고,
로욜라의 가족들에게 후송해 주었다.
부상으로 인한 치료를 마치고 회복기에 접어들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는 평소 즐기던 낭만적인 기사 이야기를 실은 책을 읽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성 안에 그러한 책은 없었고,
대신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책을 읽어 가면서 기사로서의 공상들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반면,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내면적인 체험을 할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는 크나큰 위안을 받았고 지난날의 생활 전체,
특히 육을 따르던 행실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회심의 길로 들어섰다.
회심 후 로욜라를 떠난 이냐시오는 1522년 3월 25일 몬세라트 산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 마을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평화를 얻으려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하였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성수련”(Exercitia Spiritualis)은 바로 이 시기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와 보속을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예루살렘 순례 후 1524년 3월에 바르셀로나로 되돌아왔다.
회심 이후 약 11년 간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1526년에는 알칼라 대학,
1527년 살라망카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1528년 여름에 파리로 학교를 옮겼다.
그곳에서 1535년 3월 14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1535년 봄 에스파냐로 돌아가 요양하였다.

   이냐시오의 연학 시기는 수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들을 규합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즉 사보아 출신인 파브르, 나바라 출신인 사베리오, 에스파냐 사람인
라이네스와 살메론과 보바디야,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 등이다.
이들은 이냐시오처럼 외적 고행, 구걸, 단식, 맨달로 다니기 등으로 단련하였다.
 
1534년 8월 15일 그들은 몽마르트르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그리고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였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고향으로 돌아온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7년 1월 베네치아에서 9명의 동료들과 모였으나,
당시 터키와의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7년 겨울 이냐시오는 동료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갔다.
로마 근교의 라스토르타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이냐시오는
환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부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를 보았는데,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예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불렀으며,
교황 바오로 3세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사실 그때까지 장상, 규칙, 전통 없이 열심히생활하던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1540년 9월 27일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를 통해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 4월 이냐시오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 22일에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서원을 하였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과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다.
 
이냐시오는 1555년 여름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7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622년 3월 12일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의 시신은 로마에 있는 예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제르마노(7.31)
 
성인명 제르마노(Germanus)
축일 7월 3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활동지역 오세르(Auxerre)
활동연도 378?-448년
같은이름 게르마노, 게르마누스, 제르마누스

아일랜드의 성 파트리치오(Patricius)에게 사제품을 주는
오세르의 성 제르마노(Germanus) 주교

   성 게르마누스(제르마노)는 378년경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
지방에 있는 오세르의 좋은 가문에서 출생하여
갈리아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후 로마에 가서 법학을 공부하여
로마 시의 변호사가 되었다.
 
황제 호노리우스로부터 갈리아 지역을 다스리는 6명의 고위 관리 중 하나로
임명받아 지방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내적 회개를 체험한 성 게르마누스는 관직에서 물러나 사제가 되었다.

   오세르의 주교였던 성 아마토르(5월 1일)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그가 사망하자 즉시 선출되어 418년 7월 7일 주교품을 받았다.
이때 그는 자신의 부인(로마에서 결혼한 에우스타키아)과 헤어져
엄격한 고행을 택하여 수도자로 생활하였다.
 그는 투르의 마르티누스(11월 11일)와 더불어 갈리아에 공동체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 당시 영국에는 이단인 펠라기우스주의가 퍼져 교회가 동요하고 있었다.
영국 주교들의 도움을 요청하자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4월 6일)
429년 성 게르마누스에게 영국으로 가도록 지시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영국으로 가는 도중 후에 성녀가 된 어린 시절의
제노베파(1월 3일)를 만나 신앙 성숙을 위해 노력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는 영국의 이단들을 평정하고, 영국 군대로 하여금 픽트족과 색슨족의
연합 공격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도록 하는데크게 기여하였다.
이 승리는 ‘알렐루야 승리’라고 기록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성 알바누스 무덤 앞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승리의 기쁨을 하느님께 돌렸다.
그는 448년 7월 31일 라벤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게르마누스는 여러 세기 동안 투르의 마르티누스 다음으로
가장 사랑받고 공경을 받는 프랑스 성인이다.
말과 행동과 기적의 능력이 뛰어난 성인으로서, 성 프란치스코 드 살(1월 24일)
그를 일컬어 ‘갈리아의 기적의 게르마누스’라고 불렀다.
 
 
 
 
 
요한 콜롬비니(7.31)
 
성인명 요한 콜롬비니(John Colombini)
축일 7월 31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증거자,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300-1367년
같은이름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콜롬비니
 
   이탈리아의 시에나 출신인 요한 콜롬비니는 사업에 성공한 사람으로
비아지야 체레티니와 결혼하였다.
 
그는 어느 성인전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자신의 생활양식을
완전히 바꾸고, 자신의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희사하였으며
자기 집을 병원으로 꾸몄다.
아내를 위하여 약간의 배려를 해 준 뒤
그는 절대 가난과 회개를 실천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병원에서 병들고 가난한 이를 전적으로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는 부유한 집안들이 그를 존경하며 추종자들로 몰려들게 되자
시에나에서 잠적해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을찾아다녔다. 
   이리하여 그의 수많은 제자들은 예수 성명에 대한 특별한 신심 때문에
‘예수아티’(Gesuati)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프라티첼리의 오류를 보전하는 임무를 위하여 조사할 때부터
교황 우르바누스 5세는 예수아티를 수도회로 인정하였고,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환자들을 돌보는 평수사회인
성 히에로니무스의 사도적 성직회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얼마 후 요한은 볼세나 호수에서 병을 얻어 시에나로 돌아오는 길에
운명하였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7.31)
 
성인명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Justin de Jacobis)
축일 7월 3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선교사, 주교
활동지역 에티오피아(Ethiopia)
활동연도 1800-1860년
같은이름 유스띠노, 유스띠누스, 유스티누스, 저스틴

에티오피아의 성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Justinus de Jacobis)


   유스티누스 데 야코비스는 이탈리아 루치아나의 산 펠레에서
17명의 자녀 가운데 14번째 아들로 태어나 나폴에서 성장하였다.
 
1818년 선교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며, 1824년 6월 12일
브린디시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티오피아 선교단(빈첸시오회)의 일원으로
1839년에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였다.
2명의 동료 사제와 함께 그는 서서히 그 지방의 문화를 익히며 주민들의
친구도 되고 종도 되면서 온갖 장애들을 극복하며 선교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 선교활동은 주민들의 무지와 중상모략으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래를 위하여 방인 사제 양성에 주력하여
3명의 방인 사제를 배출하고 자신은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주 대중적인 선교를 실시하였다.
1853년경 에티오피아의 교세는 20명의 방인 사제와 5천명의 신자가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곤다르(Gondar)에서 체포되어
7개월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추방되었다.
그 후 그는 재차 입국에 성공하였으나 또 다시 감옥에 갇혔고, 프랑스군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지만 1860년 7월 31일 열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에티오피아 교회의 재건자였던 그는 1939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5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