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6월 22일 聖토마스 모어, 聖바울리노 님..

H-Simon 2010. 6. 21. 08:46

 

 

6월 22일(화)

聖토마스 모어, 聖바울리노 님..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Aloysius Gonzaga)
16.jpg
                                                           내 영혼의 노래
 
 
 
 ▶토마스 모어(6.22)
 
성인명 토마스 모어(Thomas More)
축일 6월 2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인본주의자,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477-1535년
같은이름 도마, 토머스

   법률학자이자 판사이던 요한 모어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모어는 12세 때에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인
요한 모턴의 조수생활을 하다가 옥스퍼드로 가서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501년 법조계에 진출했다.
1504년에 그는 영국 의회에 진출했으며 카르투지오 회원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1505년에 제인 콜트(Jane Colt)와 결혼하였다.

   그들의 집은 영국의 문예부흥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 이유는 당대의 석학들과 지성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영국 인본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 석학이었다.
그는 시, 역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논문, 신심 서적과
기도문 등을 저술했고 고전 번역 작업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유토피아”(1515-1516년)는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상을 묘사한 것으로 세계의 고전이 되었다.
또 “루터를 배격하는 헨리의 변명”은 그가 가르쳤던 헨리 8세에 대한
강력한 옹호가 담긴 서적이다.

   1510년 그는 런던의 주 장관대리가 되었고, 1511년에는 아내와 사별한 뒤에
과부이던 엘리스 미들턴(Alice Middleton)과 재혼하였다.
헨리가 그의 형 아서(Arthur)의 사망으로 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그는 프랑스와 플랑드르의 외교사절로 활약했고,
1517년에는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523년에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529년에는
월시(Walsh) 추기경 후임으로 재상이 되었다.
모어는 이때 왕의 이혼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으로 기용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에 침묵을 지킴으로써 왕의 혼란을
가중시킴과 아울러 분노케 하다가, 헨리 8세가 카타리나 왕비와의 이혼
허가를 교황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을 때
국왕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 교회를 반격하는 일련의 서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후 모어는 재상직을 사임하고, 1532년에 첼시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는 헨리 8세가 카타리나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에게 후계 지위를 양도한다는
소위 왕위 계승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왕에게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4년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고, 15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영국 교회에 대한 왕의 수장령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는
토마스 크롬웰에게 침묵권을 행사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일로부터 꼭 5일 째 되는 날인 7월 6일, 마침내 그는 참수형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193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법률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바울리노(6.22)
 
성인명 바울리노(Paulinus)
축일 6월 2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저술가
활동지역 놀라(Nola)
활동연도 353-431년
같은이름 바울리누스, 빠울리노, 빠울리누스, 파울리노, 파울리누스

놀라의 성 바울리노(Paulinus)

   성 메로피우스 폰티우스 바울리누스(Meropius Pontius Paulinus)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르도의 학교에서 그리스-라틴 문화를 접하였고,
시와 수사학은 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의 스승이었던 데치무스 막누스로부터
배웠다.
그의 부친은 갈리아(Gallia) 지방의 총독이었다.
그는 성공적인 법률가로 성장하여 여러 관직을 맡았고 골, 이탈리아
그리고 에스파냐 등지를 여행하였으며,
에스파냐 여자인 테라시아(Therasia)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는 보르도의 주교 델피누스를 만난 후 영세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공직에서 물러나 아키텐(Aquitaine)으로 은거하였다.
 390년 그는 에스파냐에 있는 아내의 영지로 이사했는데, 그 당시에 외아들이
죽음으로써 막대한 재산을 교회에 희사하고 자신은 아주 엄격한 삶을
시작하였다.
393년경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자 바울리누스 신부는 나폴리(Napoli) 근교인 놀라의
성 펠릭스 무덤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는 자선가로 유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폰디에는 성당을,
놀라에는 수로(水路)를 그리고 수도원 같은 분위기였던 자신의 집에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하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그는 폭넓은 교우관계를 유지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암브로시우스(Ambrosius),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수없는 명사들이 있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51편의 편지, 32편의 시 등이 있다.
는 프루덴티우스(Prudentius)에 버금가는 대시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요한 피셔(6.22)
 
성인명 요한 피셔(John Fisher)
축일 6월 2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추기경, 순교자
활동지역 로체스터(Rochester)
활동연도 1469-1535년
같은이름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피셔

   1469년 영국 요크셔(Yorkshire)의 베벌리(Beverly)에서 어느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한 피셔는 1483년 케임브리지의
성 미카엘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 그는 1491년 불과 22세의 나이로 특별 관면을 받은 후 사제로
서품되었다.
1497년 그는 국왕의 모친인 마가렛 보퍼드의 고해신부로 활약하는 한편,
그녀를 설득하여 케임브리지에 그리스도 신학교를 설립하고
1505년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1504년 케임브리지 성 미카엘 신학교의 총장이 된 그는 같은 해에
로체스터의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헨리 7세와 헨리 8세의 혼란한 정치 풍토 속에서 헨리 8세 왕이
교황으로부터 영국 교회를 분리하고 수장령을 반포했을 때
그는 용감하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의 법을 계속하여 따르겠습니다.” 친구와
적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양심을 끝까지 지켰다.
토마스 크롬웰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도 남아 있다.
“나는 다른 어떤 사람의 양심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는 1534년 4월 고령에도 불구하고 수장령에 대한 서약을 거부하고
성 토마스 모어와 함께 반역 죄인으로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한편 교황 바오로 3세가 성 요한 피셔 주교를 구하기 위해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나, 오히려 헨리 8세의 분노를 사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그는 1535년 6월 22일 마지막으로 '테 데움'을 노래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1886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