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6일(월)
聖 마르첼리노, 聖 스테파노님..등 


교황 성 마르첼리(Marcelli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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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람> **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성 마르첼리누스(마르첼리노)는 296년에 교황 성 카이우스(축일, 4월 22일)를
계승하여 로마(Roma)의 주교좌(교황좌)에 올랐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절정에 달한 폭풍의 시기에 8년 동안
재임하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다.
그가 일시적으로 배교한 사실이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그 근거는 희박하며,
그의 죽음과 더불어 그는 성인으로서 또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마르첼리누스 교황은 선종한 후에 마르첼루스(Marcellus) 신부에 의해
로마의 살라리아 가도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그는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304년 10월 25일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10월 25일을 성인의 두 번째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
그레고리우스와 도미니코는 도미니코회의 초창기에 살았던 수도자들이다.
그들은 영혼을 구하려는 열망에 불타서 원장의 허락을 받고 에스파냐
아라곤의 바르바스트로 부근의 무어인들이 사는 산악지대 마을인 몬타노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피레네 산맥을 따라 가면서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복음 말씀 그대로 돈도 없고 맨발이었다. 작은 마을에서 작은 마을로,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다니며 말씀을 전하고, 대접해 주는 대로 먹고 잠을 잤다.
그러나 산 속의 바위 밑과 자연적인 동굴에서 지낸 때가 더 많았고,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없어 기진맥진한 적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마을 어귀에 닿으면 조그마한 종을 울려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바위 밑에 피신해 있던 중
바위더미가 무너지면서 그 밑에 깔려 죽었다.
그들의 시신은 기적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바르바스트로 교구의
베시안스(Besians)에 안장되었다.
복음적인 선교사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그들에 대한 공경은
185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승인되었다.
☞2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
성 리카리우스는 프랑스 아미앵 교외 첸툴라 태생으로 그곳의 주민들은
거의 모두가 이교도들이었다.
그 당시 2명의 아일랜드 선교사제가 이 지역을 지나다가 큰 변을 당했을 때
그가 이들을 숨겨주고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이 두 선교사는 그를 교육시켜 사제로 서품을 받도록 조처하였다.
사제가 된 그는 몇 년 동안 영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프랑스로 돌아와서
선교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또한 성 아달발두스(Adalbaldus, 2월 2일)와 그의 아내인
성녀 릭트루다(Rictrudis, 5월 12일) 및 국왕 다고베르트(Dagobert)에게
이 세상의 위험과 헛됨을 설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후 그는 첸툴라에 수도원을 세우고 자신은 조금 떨어진 곳에 은둔소를 짓고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리퀴에르(Riquier)로도 불린다. |
러시아의 우스트 유고 출신인 성 스테파누스(스테파노)는 1365년에
로스토프의 어느 수도원에 입회하여 30여 년 동안을 순회 설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코미족과 코미페르먀크족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우랄(Ural) 지방까지 순회하였다고 전해온다.
그는 그들 지방의 언어를 문자화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하여
전례에서 토착어를 사용하게 하였고,
성경과 다른 번역물들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선교사로서 그의 사업은 성공적이었으나 노브고로트와 모스크바로부터
억압받는 백성들을 돌봄에 있어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1383년에 페름 교구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
이탈리아 시에나 태생의 알다는 매우 신심 깊은 남자와 결혼하여
부부관계를 절제하며 살았다.
자녀가 없는 상태에서 과부가 된 알다는 시에나 외곽에 있는
조그마한 집으로 은신하였다.
여기서 그녀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잔에 자신의 고행을 담으려는 뜻으로
수많은 고행과 자선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우리 주님께서 지상에 사시던 모습을 환시로 보았다.
이에 자극을 받은 그녀는 이 세상을 완전히 등지기로 결심하였지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감출 수 없어서 후밀리아티의
3회원이 되어 병원에서 지내며 그들을 돌보았다.
그녀는 알도브란데스카 아우데 블란카 브루나로도 불린다. |
785년경 프랑스의 수아송에서 태어난
성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는 갓난아이 때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베네딕토회 수녀원에서 양육되었다.
청년이 된 후 아미앵 근처에 있는 코르비의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였다.
당시 아빠스는 성 아달하르두스(Adalhardus, 1월 2일)였는데,
그는 성 파스카시우스의 개인적 스승이었으며,
후에 성 파스카시우스는 그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성서와 교부들의 저술에 대하여 깊이 있게 공부한 그는 부제 서품을 받았다.
822년 그는 독일 동부의 베스트팔렌(Westfalen) 지역에
새로운 코르비 수도원을 세우라는 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그는 신설된 수도원에서 수련자 담당과 수도원 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843년경 그는 코르비 수도원의 아빠스(수도원장)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아빠스가 된 후에도 부제로 머물고 사제 서품을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신이 신부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겸손함 때문이었다.
7년간의 아빠스직을 마친 후 그는 생리키에(Saint-Riquier) 수도원에 머물며
학문과 저술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가 남긴 여러 저술 중에서 성체성사에 대한 깊은 연구를 담은
“주님의 몸과 피”(De corpore et sanguine Domini)가 가장 유명하다.
그 외에도 그는 몇 권의 성서 주석서 그리고 스승인 성 아달하르두스와
그의 후임자인 왈라(Wala)의 전기도 저술하였다. |
이탈리아 피아첸차에서 출생한 성녀 프랑카 비잘타가 피아첸차의
성 시루스(Syrus)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에는 불과 7세였다.
그녀는 14세 때 서원을 하였다.
어린 프랑카였지만 다른 모든 자매들에게 올바르게 순종하는 법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신심과 극기에서도 뛰어났다.
그 후 원장으로 피선된 그녀에게 한 동안은 모든 일이 잘 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더 많은 세월을 중상과 모략으로 고생하였고 또 심적인
번민으로 괴로움을 당하였다.
그녀는 시토회의 규칙을 따르는 엄격한 가난을 지켰고,
밤마다 성당에 가서 기도하며 지내는 시간이 자는 시간보다 더 많았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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