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성 쿠트베르투스가 아일랜드계라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스코틀랜드계라고 하지만, 저명한 역사가인
성 베다(Beda, 5월 25일)는 영국 출신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어린 아이였을 때 고아가 되었고 얼마 동안 목동 노릇을 하였으며,
머시아(Mercia) 사람들과 싸웠던 경험도 있다.
성 쿠트베르투스는 영국 스코트랜드의 멜로즈(Melrose)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된 후 성 에아타(Eata, 10월 26일)를 수행하여 리펀(Ripon) 수도원으로 갔으나,
알크프리드국왕이 이 수도원을 성 발프리두스(Walfridus, 10월 12일)에게
넘겨주자 다음 해에 멜로즈로 돌아와서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661년에 멜로즈에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자신도 병에 걸릴 만큼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의 성덕은 너무나 뛰어나서 놀라운 치유 능력을 보였고,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는 주로 선교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성 콜만누스(Colmannus, 2월 18일)가 로마 전례 거행을 결정한
휘트비(Whitby)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고 린디스파른 섬의 대부분의 수도자를
이끌고 아일랜드로 돌아가 버렸을 때, 성 에아타가 그의 후임 주교로
임명되었고, 성 쿠트베르투스는 린디스파른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멜로즈에서 린디스파른 수도원으로 옮긴 그는 선교 활동을 재개했는데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 일은 그가 은수자로 생활할 허가를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은수자로서 생활하던 성 쿠트베르투스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새로 분할된 헥스햄(Hexham) 교구의 주교로 선임되었다가
다시 헥스햄 교구 대신 인연이 깊은 린디스파른의 주교로 착좌하였다.
그는 2년 동안 자기 교구를 지도하다가 최후의 날이 임박한 것을 깨닫고
파르노(Farno) 섬으로 돌아가서 3월 30일에 선종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