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들과 함께

2월18일-福者 안젤리코, 聖 시메온님..등

H-Simon 2010. 2. 18. 04:38

 

 
2월18일(목) 
福者 안젤리코, 聖 시메온님..등
                               

 

 

 

 

 

  

 

 

 

 로렌조 부티의 복자 안젤리코(Fra Angel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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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람>......** 표시는 성인 개별로 전기를 수록하신 분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번호   성 인 명   영 어 명   축 일   신 분   지 역   연 도 
1 레오** Leo 2월 18일 순교자   +260년경
2 루치오 Lucius 2월 18일 순교자 아프리카(Africa) +연대미상
3 루툴로 Rutulus 2월 18일 순교자 아프리카(Africa) +연대미상
4 막시모 Maximus 2월 18일 순교자 아프리카(Africa) +연대미상
5 막시모 Maximus 2월 18일 순교자 오스티아(Ostia) +295년
6 세쿤디노 Secundinus 2월 18일 순교자 아프리카(Africa) +연대미상
7 시메온 ** Simeon 2월 18일 주교,순교자 예루살렘(Jerusalem) +107년경
8 시몬 ** Simon 2월 18일 주교,순교자 예루살렘(Jerusalem) +2세기경
9 실바노 Silvanus 2월 18일 순교자 아프리카(Africa) +연대미상
10 안질베르토 ** Angilbert 2월 18일 수도원장,시인 첸툴라(Centula) +814년
11 알렉산데르 Alexander 2월 18일 순교자 오스티아(Ostia) +295년
12 복자 요한 피부쉬 John Pibush 2월 18일 순교자   +1601년
13 복자 윌리엄 해링턴 William Harrington 2월 18일 순교자   1566-1594년
14 콜만노 Colman 2월 18일 주교 린디스파른(Lindisfarne) 605-676년경
15 쿠시아 Cutia 2월 18일 순교자 오스티아(Ostia) +295년
16 클라시코 Classicus 2월 18일 순교자 아프리카(Africa) +연대미상
17 클라우디오 Claudius 2월 18일 순교자 오스티아(Ostia) +295년
18 테오토니오** Theotonius 2월 18일 수도원장 쿠임브라(Coimbra) +1162?/1166년?
19 파레고리오 ☞ 1 Paregorius 2월 18일 순교자   +260년경
20 복자 (프라)안젤리코** Fra Angelico 2월 18일 신부,화가   1400?-1455년
21 성녀 프레페디냐 Praepedigna 2월 18일 순교자 오스티아(Ostia) +295년
22 프룩툴로 Fructulus 2월 18일 순교자 아프리카(Africa) +연대미상
23 플라비아노** Flavian 2월 18일 총대주교,순교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449년
24 헬라디오 Helladius 2월 18일 대주교 톨레도(Toledo) +632년
총 24 성인

 

 

  ▶프라 안젤리코(2.18)  
 
성인명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축일 2월 18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신부, 화가
활동지역  
활동연도 1400?-1455년
같은이름 안젤리꼬, 안젤리꾸스, 안젤리쿠스

 


   이탈리아의 피렌체근방 비키오에서 태어나 귀도 디 피에트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프라 안젤리코는 1417년 형 베네데토와 함께 피렌체의 한 필사본

작업장에서  일을 했다.

그는 20세에 피에졸레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기도생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이때 안젤리코는 조반니 다 피에졸레라는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했고,

1436년부터는 그의 절정기에 속하는 작품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피렌체의

산 마르코수도원에서 생활하였다.

1445년에는 교황의 부름으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 내의 여러

곳에 프레스코화를 제작하였고, 1447년에는 오르비에토 주교좌성당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그의 이름이 프라 안젤리코로 널리 알려진 것은 유명한 시인이자 라틴어 학자인

코렐라의 도미니코 신부가 그를 ‘천사 같은’화가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프라’는 수도자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프라테’(frate)의 약어이다.

그는 재능 있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안젤리코라는 이름에 걸맞게 매우

청렴한 생활을 했다. 그는 당시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자신을 피렌체의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을 때 극구 사양하였다.

   1450년경 피렌체로 돌아와 피에졸레 수도원 원장을 역임한 뒤 1453년경 다시

로마로 왔고 그곳의 도미니코 수도원에서 1455년 2월 18일 선종하여 인근의

산타 마리아 델라 미네르바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1982년 10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와 동등한 전례가

공식적으로 승인되었으며, 이어 1984년 같은 교황에 의해 예술가와 미술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레오(2.18)
 
성인명 레오(Leo)
축일 2월 1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260년경
같은이름  
 


   성 레오와 성 파레고리우스(Paregorius)는 가까운 친구 사이로

성 파레고리우스가 리키아의 파타라에서 순교할 때 성 레오는 서글픈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리키아의 관리는 모든 주민들로 하여금 이교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칙령을 내렸는데, 성 레오는 친구 순교자의 무덤을 다녀오면서

이방인들의 신전을 지나쳐 집으로 왔으나, 꿈속에서 하느님이 그를

부르시어 친구와 같은 고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다시 친구의 무덤을 찾은 뒤 용감하게 거리로 나가서 이교신상 앞에

켜놓은 촛불들을 내동댕이쳤다.

그는 신성 모독죄로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후에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 19 ..함께 참조할 같은 내용임

 

 

시메온(2.18)  
 
성인명 시메온(Simeon)
축일 2월 1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예루살렘(Jerusalem)
활동연도 +107년경
같은이름 시므온

 

예루살렘의 성 시메온(Simeon)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시메온은 클레오파(Cleophas)의 아들이며

성 요셉(Joseph)의 형제이다(마태 13,55; 마르 6,3).

그러므로 예수님과는 사촌 형제간이다.

그는 성 야고보(Jacobus, 5월 3일) 사도가 순교한 뒤 예루살렘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성 시메온은 66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파괴를 초자연적으로

경고한 바 있고, 그 도시의 신자들을 인근 도시인 펠라(Pella)로 데리고 가서

예루살렘이 잠잠해질 때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시아누스 황제의 박해는 용케 모면하였으나

트라야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집정관 아티쿠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명인 열성당원 시몬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마태 10,4; 마르 3,18; 루가 6,15; 사도 1,13).

 

 

 
시몬(2.18)
 
성인명 시몬(Simon)
축일 2월 1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예루살렘(Jerusalem)
활동연도 +2세기경
같은이름 사이먼
 


   예수 그리스도의 사촌으로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성 시몬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에 언급된 ‘예수의 형제’(마르 6,3; 마태 13,55)

명단에서 등장한 시몬인 듯하다.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에서 성 시몬이 “주님의 삼촌인

클레오파(Cleopha)의 아들”이었으며, 주님의 형제 야고보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의 주교가 되었다가 노년에 순교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로마 순교록”에서는 “주교이자 순교자로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성 시몬은 클레오파의 아들이며, 구세주와 육적으로 가까운 사이로 전해진다.

그는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 다음에 예루살렘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트라야누스의 박해 때 많은 고문을 받고 120세의 나이로 용감하고 당당하게

십자가 형벌을 견디어내는 것을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이들과 재판관 자신까지

놀라워하는 가운데 순교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에 기초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던 여인들을 언급할 때

등장하는  “이모, 클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요한 19,25)는

성 시몬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 시몬은 예수님의 외사촌 형제였을 것이다.

성 시몬이 예루살렘의 주교로 임명된 것은 성 야고보(Jacobus, 5월 3일)가 순교한

 62년으로  여겨진다.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그리스도교에서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중요 위치와 역할을 상실하였다.

 

또 야고보가 순교한 이후 예루살렘에는 반로마 메시아니즘이 등장하였다.

유대 민족주의를 거부한 대부분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요르단 강 서안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결별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성 시몬이 예루살렘의 주교로 활동한 기간은 많은 박해와

어려움들로 얼룩진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안질베르토(2.18)
 
성인명 안질베르토(Angilbert)
축일 2월 1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시인
활동지역 첸툴라(Centula)
활동연도 +814년
같은이름 안길베르토, 안길베르투스, 안질베르또, 안질베르뚜스, 안질베르투스, 앙길베르트

 


   성 안길베르투스의 별명은 '호머'(Homer)인데, 그의 라틴 시가 매우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샤를대제(Charlemagne)의 궁중에서 자랐고, 알퀴누스(Alcuinus, 5월 19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 안길베르투스는 샤를대제의 딸 베르타(Bertha)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정치적인 의미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 덴마크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기를 늘 기도했는데,

폭풍우가 덴마크 군인들을 몰아내자 수도 생활을 꿈꾸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내인 베르타는 수녀원에 들어갔고, 자신은 첸툴라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그곳의 원장이 되었으며 도서관을 설립하였다.

또한 그는 수도원에서 성가 부르는 것을 도입하여 그의 수하에 있던 300명의

수도자들이 늘 애용토록 하였다.

그는 샤를대제의 절친한 친구로 신임을 받고 있었으므로 궁중 사제,

고문관, 외교관의 직책도 역임하였다. 그 당시 그는 황제에게 진언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테오토니오(2.18)
 
 
성인명 테오토니오(Theotonius)
축일 2월 1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활동지역 쿠임브라(Coimbra)
활동연도 +1162?/1166년?
같은이름 떼오또니오, 떼오또니우스, 테오또니오, 테오또니우스, 테오토니우스


   성 테오토니우스는 포르투갈 중부 쿠임브라의 주교인 크레스코니우스의

조카로서 어릴 때부터 사제 수업을 받았다.

그는 사제가 된 뒤에는 주로 본당사목을 하였는데, 매우 엄격한 생활과 높은 성덕

때문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얼마 후 그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였고, 포르투갈의 황녀와 백작이

그를 주교로 영입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자신이 항상 이를 거절했다.

 

두 번째로 성지를 순례한 뒤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회가 쿠임브라에 세운 새

수도원에  입회하여 장상을 역임하였다.

그를 지극히 존경하던 국왕 알폰수스는 성 십자가 수도원에 많은 선물을

희사하였다.

그는 80세까지 30여 년 동안을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167년

포르투갈의 주교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후에 교황 베네딕투스 14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플라비아노(2.18)
 
성인명 플라비아노(Flavian)
축일 2월 1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총대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활동연도 +449년
같은이름 플라비아누스, 플라비안

 


   콘스탄티노플의 사제이며 경리 담당이던 성 플라비아누스는 447년에

성 프로클루스(Proclus, 10월 24일)를 계승하여 총대주교로 승품되었다.

그러나 그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3세의 대관식에 특별 선물을 보내라는

크리사피우스 재상의 제안을 거부해서 큰 공경에 빠진 적이 있었다.

또 448년에 그가 소집한 회의에서는 크리사피우스의 대부이던 에우티케스 원장의

가르침이 이단이라 하여 단죄하고 사제직을 박탈하여 더 큰 파문을 일으켰다.

에우티케스는 이에 불복하여 로마에 상소했으나 교황 대 레오 1세

(Leo I, 11월 10일)는 정통교리를 고수하고자 노력한 성 플라비아누스의

용기를 격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레오의 책"(Tome of Leo)으로 전해오는 유명한 문서이다.

   황제 측은 이에 분개하여 에페수스(Ephesus) 공회의를 소집하였지만

교황은 이를 '불법 시노드'로 단정하였다.

황제의 측근들은 성 플라비아누스를 몰아내고 리디아의 히페페 감옥에

투옥시켰다.

그는 그 후 얼마 뒤에 운명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순교자로도 불린다.

왜냐하면 황제 측근 군사들에 의한 심한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451년에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에서

성 플라비아누스는 성인이자 순교자로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