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토니우스는 수도 생활의 창시자로 공경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으로 은수자들을 한데 모아서 다소 산만한
형태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고,
그들에 대하여 어떤 권위를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고독하고 한적한 독수 생활을 오랫동안 계속하였다.
251년 이집트 중부 코마나(Comana)의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난
성 안토니우스는 20세 되던 해에 부모가 사망하였는데, 하루는 부자 청년에
관한 복음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 자기에게 남겨진 유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남부 이집트의 고향 근처 산을 찾아다니면서 은수자의 지도를 받으며
독수 생활을 시작하고, 기도와 연구 및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을 했다.
그러다가 그는 맹렬한 영적, 육적인 유혹으로 한 동안 고생하였으나
끝내 이를 극복한 뒤에 그 주위에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전한다.
312년에 그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기슭에 있는 빈 무덤 동굴에
거처를 마련하고 15년 동안 노동과 기도 그리고 성서 읽기에 전념하며
엄격한 독수 생활을 했다.
그 후 나일 강 끝에 자리한 피스피르(Pispir) 산에 들어갔다가 텅 비어 있는
성채를 발견하고, 입구를 막아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약 20년 동안
또다시 독수생활을 했다.
이 때 그의 뛰어난 성덕과 수많은 기적에 관한 소문을 듣고 여러 가지
소망을 지닌 사람들이 성 안토니우스를 찾아와서 충고를 청하고 또 어떻게
사는지 살피러 왔다.
제자가 되기를 원하였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은수자들의 집단이 여러 곳에
생겨났는데, 그 중 니트리아(Nitria)와 스케티스(Scetis)가 유명하다.
이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고 각자 움막에서 살면서 주일이나 축일에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영적 스승인 성 안토니우스에게서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성 안토니우스는 독수자로서 더욱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홍해
근처에 있는 콜짐(Kolzim)이라는 높은 산으로 들어가 은둔소를 정하고
기도와 수덕 생활에 열중하였다.
성 안토니우스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대항하여 정통 교리를 옹호해
달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의 청을
받고 알렉산드리아로 간 일 외에는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만일 전승이 옳다고 한다면 그는 356년 10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성 안토니우스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가 전해진 이유는 그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지내던 성 아타나시우스가 기록한 “안토니우스의 생애”가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면 사막의 은수자들이 환상이나 혹은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람임과 동시에 학문이 뛰어났으며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이 엄격하였다고 한다.
성 안토니우스는 생전이나 사후나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에 대한 공경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하느님의 종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성 안토니우스는 '사막의 교부',
'모든 수도자들의 원조', '은수자들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그의 휘장으로 묘사되는 그림은 돼지와 종이다. |